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이 예언한 종말론은 반 쯤은 맞았고 반 쯤은 틀렸다. 그들은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가 빈부격차 심화와 빈곤의 고착화로 인해 제풀에 무너질 것이라고 예단했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의 상시화, 일반화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능력주의 가치마저도 훼손할 것이라는게 그들의 예상이었다.

그같은 예상의 논거 중 하나는 자본의 수익률이 노동 소득률을 앞서가는 상황의 구현이었다. 실제로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는 금전적 기반이 없는 개인의 노력과 의지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 나타나기 쉬운 것이 빈곤층 서민들의 자포자기 상태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유행하는 단어들인 ‘수저계급론’이나 ‘삼포’, ‘오포’ 하는 것들도 다 그런 맥락에서 나타났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 동인이 되어준 이들도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허우적대는 흙수저 백인들이었다. 빈곤의 고착화를 체험 중인 미국 백인들은 그들 특유의 선민(選民)의식으로 인해 가난한 유색인종들보다 더 큰 분노를 품고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백인들 사이에 ‘샤이 트럼프’ 현상이 그토록 심했던 것을 보면 그동안 그들의 분노가 마음 깊은 곳에 얼마나 단단히 억눌려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언이 다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다. 냉정하게 그 골간을 들여다 보면 그들의 예언은 빗나갔다고 평가하는게 오히려 더 정확하다. 공산주의 실험이 실패한데 반해 자본주의 체제는 여전히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고는 아직도 유효하다. 자본주의의 폐단을 해소하려는 부단한 노력이 멎는 순간 자본주의 체제는 언제든 붕괴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한 나라들은 경쟁을 바탕으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왔다. 마르크스의 종말론을 비웃으며 그 체제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요소는 끝 없는 성장이었다. 만약 경제성장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자본주의 체제는 구시대의 유물로 역사 속에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경제성장이 장기간 멎어 있었다면 불평등과 빈곤의 고착화는 우리 사회가 견뎌내기 어려운 지경까지 심화됐을 것이고, 그 결과는 자본주의 체제의 소멸이었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고도 성장기엔 빈부격차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우리 나라도 그랬다. 누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낙수효과로 인해 성장의 혜택이 서민층에게까지 조금씩이라도 미쳤던게 그 이유였다. 그 시절엔 누구나 빈곤하더라도 형편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다. 오늘보다는 내일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계층간 사다리를 통한 사회이동에 대해서도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미국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유럽보다는 미국을 더 닮으려 했던 우리는 지금 미국만큼이나 불평등 심화로 인한 홍역을 단단히 치르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일이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고 말했다가 역풍을 맞은 일 모두 빈곤의 고착화에 진저리치는 흙수저들의 분노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상황이 이럴진대 대선 주자를 자처하는 우리 정치인들은 여전히 오불관언이다. 솔직히 말하면, 뭐가 어디서부터 얼마나 잘못돼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듯 보인다. 연일 정쟁(政爭)은 요란한데 지금의 경제난을 헤쳐나갈 대안을 고민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수저계급론을 근본적으로 누그러뜨릴, 현안 해결의 출발점은 역시 최소한의 성장 유지다. 기본적인 성장은 분배와의 선후관계를 논하기 이전의 당연한 과제다. 성장이 멎거나 수년 전의 미국처럼 마이너스 성장이 현실화된다면 혈세를 쏟아부어 행하는 분배의 효율성조차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빈부 차이가 도를 넘어서 버리면, 불평등 압력이 성장의 동인이라는 보수 학자들의 주장은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된다. 우린 미국의 지난 대선 과정을 통해 그런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성장을 우선시하자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요는 성장 담론이 아예 실종돼버린 정치권의 현실을 지적하고자 할 뿐이다. ‘벚꽃 선거’ 이야기가 자주 언급될 만큼 대선이 코앞에 와 있다고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신기하리만치 정치권에서 성장 이야기가 사라져버렸다. 대권 주자들이 앞다투어 성장률 공약을 내세우던 이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더 우려스러운 점은 파이를 키우겠다는 사람은 없고, 제 손으로 그 걸 떼어 나눠주겠다는 사람들만 득실댄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모두 공염불로 끝나고 말았지만, ‘7-4-7’이든 한국판 양적완화든 해묵은 성장 및 경제살리기 담론이 새삼 그리워질 정도다.

성장 담론의 실종은 대권 주자들의 자신감 상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원인은 의지 박약이다. 굳이 달성하기도 힘든 공약을 내세웠다가 공약(空約)으로 매도당하느니, 비어가는 곳간일 망정 그 안의 재물을 나눠주겠다는 손쉬운 공약으로 실속이나 챙기겠다는 심산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얘기다.

포퓰리즘 정도로 말하자면 동일노동 동일임금 공약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사안이라 할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공약은 합리성 여부를 논하기 이전에 될성부르지도 않다는 점이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뜻이다.        

대권 주자들의 경제관련 공약은 이번에도 적지 않다. 지적하고 싶은 점은 우리 경제가 올해 2% 성장하기도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력 대권 주자 중 성장률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이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는 대선에 나설 주자들이 ‘너 잘 만났다’는 듯 재벌 손보기 공약 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재벌 개혁이든 재벌 해체든, 노동이사제든 집중투표제든 재벌들의 갑질을 막겠다는 취지의 약속들은 나름대로 이유와 설득력이 있는 내용들이다. 그게 촛불 민심의 중요한 일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재벌 개혁을 넘어 어떻게, 얼마나 우리 경제를 키워갈지에 대한 큰 그림이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늘려주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는 뭐니뭐니 해도 최소한의 성장이다. 성장이 담보되지 않는 한 빈부격차 해소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책들은 백약이 무효다.

우리가 그토록 냉소해온 트럼프조차 경제정책의 초점을 ‘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에 정확히 맞추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허울 좋은 ‘팍스 아메리카나’를 버리고 ‘아메리카 퍼스트’를 앞세운 것이나, 대미 무역흑자국에 고율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밖에 일자리 해외 유출 결사 반대 및 유입 독려, 사회 기반시설 투자 확대, 강한 달러에 대한 거부감 표출 등등 또한 트럼프노믹스를 대변하는 언행들로서 모두 그 범주 안에 있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정책도 서슴지 않겠다는 투의 트럼프의 마음씀이 야속하면서도 은근히 부러운 건 필자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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