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6월 10일, 필자는 일본 요코하마 종합경기장에 있었다. 2002한일월드컵축구대회 개막을 1년 앞두고 리허설을 겸해 열린 2001컨페더레이션스컵 축구대회 결승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결승 진출국이 일본과 프랑스였던 만큼 그 날 저녁 요코하마 경기장 주변은 인파로 북적였다. 일본이 당시 세계 최강이던 프랑스와 미니 월드컵으로 불리던 컨페드컵 대회 우승을 다투게 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인파에 부대끼는데다 도쿄만(灣)에서 신요코하마 쪽으로 밀려오는 비릿하고 후텁지근한 공기가 불쾌지수를 높였지만, 일본인들은 놀라울 만큼 질서정연했다. 범생이도 그런 범생이들이 없었다.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은 경기장 인근 전철역에 내리면서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역무원이 나와, 돌아가는 전동차 표를 미리 사두라고 안내하자 그들은 하나 같이 줄을 서서 그 지시를 따랐다. 경기가 끝난 뒤 돌아갈 때 매표창구가 붐빌 수 있음을 감안한 행동이었다. 역에서 경기장까지 10분 남짓 걸어가는 동안의 행렬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의 이동을 연상시켰다. 이동 간의 그들은 신기할 만큼 조용했다.

일본인들의 질서정연함은 경기가 끝나고도 또 한번 발휘됐다. 경기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수만명이 경기장 앞 광장에서 거리응원을 펼쳤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는 거짓말처럼 깨끗했다. 그 많은 군중이 너무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이게 일본의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부러우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행동에서 전체주의의 냄새가 난다고 느껴진 탓이었다.

혼자 튀는 짓 절대 안하고,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이지메(집단 따돌림)를 가하곤 하는 그들에게 집단의 가치는 늘 개인의 그 것보다 우위에 있는 듯했다. 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등교시킬 때 튀는 색상, 특이한 모양의 옷이나 가방을 안 입히고 안 메도록 세심하게 주의한다는 일본인들이고 보면 요코하마에서 보았던 그들의 행동은 너무나 당연한 집단의식의 발로였다. 그들의 질서의식에 감탄하면서도 감동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그렇다면 2016년 말과 2017년 초에 걸쳐 주말마다 광화문광장 등 대한민국 전역에서 펼쳐지는 촛불집회는 어떤가? 집단의 질서와 ‘와’(和)를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한다는 일본인들의 집단행동과 같은 유형일까? 

그건 분명히 아니다. 광화문광장 등의 시민들은 고분고분하게 말 잘 듣고, 공동체 이익을 위해 무작정 개인의 이익을 희생하는 이들은 아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달리 순치를 거부하는 기질이 무척이나 강한 편이다. 촛불을 들고 전국의 광장을 누비는 사람들에게서는 자유분방함과 저마다의 개성이 넘쳐흐른다. 경쟁적으로 기발한 아이디어를 동원한 튀는 행동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촛불을 든 사람들에게서는 공동체의 기능적 일원인 국민이기보다 참여의식이 강한 시민의 냄새가 물씬 느껴진다. 그게 요코하마의 일본 국민들과 촛불집회의 대한민국 시민들을 구분짓게 하는 차이다.

필자는 앞서 이 난을 통해 우리의 촛불집회를 유럽의 시민혁명에 비유한 바 있다. 촛불시민들을 ‘부자 나라의 가난한 백성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묘사하기도 했다. 확실히 그들은 시민의식과 그 기반인 개인의 권리의식으로 충만한 사람들이다. 더 중요한 점은 권리와 책임이 분리될 수 없는 개념임을 그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게 촛불시민들이 일사불란하지 않으면서도 질서정연함을 잃지 않는 힘이다.

촛불시민들의 행동에서 전체주의의 분위기는 털끝만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려는 개개인의 욕구가 하나로 모여 거대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을 뿐이다. 세계 어느 곳에서 대한민국 촛불집회와 같은 문화가 피어날 수 있을까? 100만 내외의 인파가 규율 없이 임의로 한 자리에 모이고도 폭력 약탈은 고사하고 부상자 한명 없이 집회를 마칠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 어디에 또 있을까? 회를 거듭할수록 촛불집회가 더욱 자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다.

그런 촛불민심을 박근혜 대통령 측 변호인이 감히 모독했다.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는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 재판(2차 변론기일)에서 “촛불 민심은 민의가 아니다.”라고 강변했다. 이 정도면 그 주장은 말이 아니라 소리다. 의미가 통하지 않는 까치 뱃바닥 같은 소리라는 얘기다.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붓지 않고서는 낼 수 없는 소리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대리인단 스스로 “협의된 내용이 아니다.”라고 진화하고 나섰겠는가?

서 변호사의 주장은 한국의 성숙하고도 신성한 시민의식에 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그 것까지도 애써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박근혜를 소크라테스나 예수에 비유해 말한 것만 보아도 이미 논쟁할 가치가 없는 대상임을 짐작 수 있기 때문이다. 정작 우려되는 것은 법률 대리인의 그 말이 박근혜의 인식을 충실히 대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시중 농담처럼 정말로 박근혜가 100만 인파의 촛불집회 의미를 나머지 4900만 시민의 지지로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마저 들 정도다.

진짜 우려스러운 점은 박근혜 측의 그같은 유체이탈식 인식이 겉보기와 달리 치밀한 계산의 결과일 가능성이다. 자신을 지지하는 한줌의 세력들에게 끊임 없이 메시지를 던지면서 촛불시민들을 다툼의 일방으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그 속에 배어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집권 이후 국가 운영보다는 정치적 술수에만 관심을 기울여온 박근혜였음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차고 넘친다고 볼 수 있다.

헌재의 1차 변론기일을 이틀 앞두고 점심식사 중인 출입 기자들에게 30분 전에야 기습적으로 기자간담회를 갖자고 청한 것도 갈고 닦은 정치적 술수의 일환이었다. 자료 준비는 물론 질문 내용조차 정리하지 못한 채 간담회장을 찾은 기자들은 결국 박근혜에게 보기 좋게 한판패를 당하고 말았다. 기자들로서는 백전백패의 싸움에 울며 겨자먹기로 응한 셈이다. 이 쯤 됐으면 이제부터는 헌재 결정이 나올 때까지 청와대 출입기자단이 박근혜와의 간담회 및 회견을 전면 보이콧하는 방안도 신중히 검토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박근혜의 기자단 및 헌재 농단을 원천적으로 막을 확실한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헌재가 탄핵소추 건을 부지런히 심리해 하루라도 빨리 인용 결정을 내리는게 그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대한민국 선진 시민들의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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