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일상에서 지켜야 했던 갖가지 행동양식들이 상세히 기술돼 있다. 그 내용을 읽고 있노라면 앓느니 죽는게 낫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물론 소설 속의 마을 군수가 감히 양반 신분을 넘보려는 돈 많은 상민에게 겁을 주기 위해 양반의 법도를 과장되게 표현한 측면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양반전’이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 점을 염두에 두더라도 ‘양반전’은 당시 양반들 스스로 만든 법도가 얼마나 처절하고 엄격했는지를 엿보게 해준다. 꼭두새벽인 오경(五更)에 일어나 ‘동래박의’를 외어야 하고, 사람을 부를 때 길게 목청을 뽑아 부르고, 걸을 땐 신발을 끌며 느릿하게 발을 옮겨야 하며, 더워도 버선을 벗지 말 것이며, 쌀값을 묻지 말고, 밥 먹을 때도 맨상투 차림을 삼가고, 국을 후르륵 마시지 말 것이며 등등….

조선시대 양반들이 그처럼 까다로운 법도를 만들고 애써 이행함으로써 얻으려 했던 것은 그들만의 배타적 권위였다. 그 권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법도는 ‘상것’들이 언감생심 흉내내지 못할 만큼 까다로워야 했다.

조선 양반들의 행동을 서양 사회학의 이론을 빌려 문화자본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양반 귀족의 법도가 까다롭기로는 동서양이 따로 없었던 듯하다.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의 왕실이 그들만의 까다로운 법도를 만들어 지켜나가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권위는 특권층들이 그들만의 배타적 이익을 누리기 위해 형성한 소중한 무기였다.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토대로 상류층들은 그들만의 불가침 영역을 만든 뒤 사회 전체의 이익 대부분을 과점할 수 있었다. ‘양반전’에서 보듯 양반은 이웃 상민의 소를 함부로 끌어다 자기 집 논밭을 먼저 갈고, 인력이 필요하면 상민들을 잡아다 일꾼으로 부려먹을 수 있었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스스로 만들어낸 권위가 이익을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기까지 한다. 탈권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특히 정치인들에게는 더 그러하다. 그들에게 권위는 하루 속히 털어내야 할 장애요소일 뿐이다. 오늘날 어느 정치인이 스스로 권위를 높이려 젠체한다면 그는 필시 유권자들로부터 ‘진상’ 취급을 받을 것이다. 정치가들이 국민을 다스리던 왕조시대의 잔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반대로 그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공화국 시대가 확립된 현실이 그 배경이다.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공직자를 목민관이 아닌, 공복으로 칭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정치 지도자의 탈권위는 대통령들의 일인칭 호칭의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연설 때 ‘나’라는 표현을 썼던 것은 중장년층이면 누구나 넉넉히 기억한다. 워낙 오래 권좌에 있었던 만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중들 앞에서 “나는…”이라는 말로 연설문을 낭독하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에 등장한 전두환 대통령은 ‘본인’이라는 말을, 노태우 대통령은 ‘이 사람’이란 말을 일인칭으로 즐겨 사용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대통령들의 일인칭은 ‘저’로 굳어졌다.

얼마 전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팔 없는 러닝셔츠 차림으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손빨래하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다. 민생투어를 하던 도중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다른 여권의 잠룡중 한 명인 정우택 의원은 “남우세스럽다.”고 말했다. 서민 코스프레도 정도껏 하라는 행간의 냉소가 읽혀지는 힐난이었다. 김무성은 민생투어를 하면서 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른 모습까지 선보이며 털털한 이미지를 과시했다. 그 자체가 꾸며진 행동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김무성의 행동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잠바때기’ 차림에 낡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서민 분위기를 풍긴 것도 비슷한 사례다.

미국도 분위기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툭하면 자기를 희화화함으로써 조크를 만들어내곤 한다. 자신을 원숭이에 비유하는가 하면, 자신의 뿌리가 아프리카 케냐임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웃길 때도 있다. 지난해 케냐를 방문했을 때는 “출생 증명서를 가지러 온 것은 아니다.”라는 조크를 남겼다. 오바마의 출신지를 집요하게 따지고 들며 인종 차별적 공격을 가하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등에 대한 반격이기도 했다.(오바마는 하와이 태생이다.) 오바마는 그같은 조크를 개발해내기 위해 전담 조크 작가까지 두고 있다. 탈권위를 통한 자기 비하 조크가 대통령직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같은 행동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오바마의 권력이 약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스스로 권위를 털어버린 만큼 오바마는 유권자들로부터 막강한 권력을 보장받고 있다. 오늘날 정치 지도자의 힘은 철저하게 유권자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두 번째 임기의 마감을 코앞에 둔 지금도 50%를 웃도는 지지율을 무기로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 - 내 의사를 남에게 관철할 수 있는 힘 - 을 누리고 있다.  

정치인들 사이의 탈권위 바람은 보다 확고해진 주권재민 원칙의 산물이다. 이제 국민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정치 지도자는 없다. 그런 지도자의 건재는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나 가능했다. 근대국가 체계를 갖춘 이후에도 한동안 그같은 부조리를 가능케 했던 것은 부당하게 동원되곤 했던 물리력과 사정기관의 강압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엔 정치 지도자가 권력 유지를 위해 물리력을 오남용하는 일은 사라졌다. 그러나 아직도 사정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온전치 못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민감한 사안마다 수사 지침을 내리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부터가 사정기관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되고 있다. ‘정윤회 국정농단 의혹’이 불거졌을 때, 그리고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특감 때 박근혜는 ‘국기문란’이란 말 한마디로 일거에 사건의 본질을 바꾸어버렸다. 그 말 이후 전자의 본질은 ‘비선의 국정농단 의혹’에서 ‘문건 유출 시비’로, 후자의 본질은 ‘우병우 비리 의혹’에서 ‘감찰내용 누설 시비’로 뒤바뀌고 말았다. 진행 중인 이석수 특검에 대한 수사는 논외로 치더라도, 적어도 정윤회 사건은 뒤바뀐 본질에 맞춰 착실히 수사가 마무리됐다.

미르 및 K스포츠재단 설립을 둘러싼 청와대 권력 개입 의혹이 불거지자 이번에도 대통령의 입에서 비슷한 발언이 나왔다. 합리적 의혹 제기는 “확인되지 않은 폭로성 발언”으로 매도됐고, “사회를 뒤흔들고 혼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독소로 단정지어졌다. 예의 ‘국기문란’이란 표현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또 한번 국민들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발언을 한 셈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도전만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엿보이는 발언들이다. 임기말로 접어드는 박근혜의 리더십이 갈수록 불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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