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을 전후해 활동한 이탈리아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는 자기 집 정원을 가꾸는 과정에서 80대20 법칙을 발견했다. 20%의 콩깍지에서 전체 콩 수확량의 80%가 생산되더라는게 해당 법칙의 대강이었다. 파레토의 법칙 또는 80대20 법칙으로 불리는 이 고전적 이론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이 이론은 사회 불평등 현상을 설명하는 논리적 근거로 자주 애용된다. 경쟁사회에서는 자연스레 상위 20%가 80%의 부를 과점하게 되고, 소수 엘리트들은 기존의 유리한 여건을 발판으로 미래에도 더 쉽게, 더 많은 부를 축적할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의 당 대표 등극은 80대20 법칙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스스로 말했듯이 흙수저도 아닌 무수저 출신으로서 당내 최고위 직급인 대표까지 신분이 수직상승했으니 하는 말이다. 진정한 무수저였다면 그는 80%의 부실한 콩깍지 중에서도 쭉정이에 속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정현 대표는 당선 뒤 당 사무처 직원들과 가진 월례조회에서 자신이 16개의 계단을 밟아 올라와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강조했다. 하위 직급에 있는 사람,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 등 비주류도 모두 희망을 갖자는 취지의 말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사무처의 최말단인 간사병(丙)에서 출발해 간사을, 간사갑을 거쳐 당 대표직까지 올라온 험난한 과정을 강조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해석됐다.

실제로 이정현은 간사병 시절 당사 기자실에서 출입기자들의 뒷바라지 일을 했던 인물이다. 보도자료 배부하고, 급한 일 있으면 기자들에게 연락하고, ‘조지는’ 기사가 나오면 읍소하고 등등…. 당시의 당사 출입기자들 중엔 “내가 당 대표(총재)와 마주 앉아 폭탄주 돌릴 때 이정현은 밖에서 신발 정리하던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정당이나 중앙부처 출입을 오래 한 고참 기자들 중에는 남이 뭐라 생각하든 아랑곳 없이 “내가 왕년에…”란 표현과 함께 이런 유의 과시적 발언을 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이정현은 존경할 만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그가 걸어온 과정 자체가 감동 어린 스토리 텔링이다. 문제는 그 감동이 실망으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실망을 넘어 경멸로 이어지는 사례도 발견된다. 거대한 조직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인간 사회에서 이뤄지는 출세의 이면을 들여다본 사람일수록 감동의 강도를 약하게 느끼는 경향도 있다. 아예 처음부터 이정현 유의 출세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성장해오는 과정에서 보여온 피나는 노력과 열정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보여온 맹목적이라 할 정도의 - 제삼자의 눈엔 그렇게 비쳐질 가능성이 농후한 - 충성심이 위험스럽게 느껴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더구나 충성의 대상이 국가가 아닌, 특정 정권이나 특정 정치 지도자로 한정된다고 의심될 때면 섬뜩한 느낌마저 들곤 한다. 충성심의 이면엔 강렬한 배타성이 자리하기 마련인 탓이다. 공동체 전체가 아니라 일개인을 향한 맹목적 충성심은 그래서 위험하다.

이정현의 주군을 향한 충성심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때 유별난 측면이 있다. 단, 그 것이 의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예를 들면, 중국 전국시대 때의 공자나 삼국시대 당시의 제갈량, 심지어 일본 전국시대의 사무라이들조차도 주군을 가려서 섬겼다. 주군을 평가하는 기준은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의 실현 가능성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그들의 관계맺음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가치는 의였다. 의가 무너지면 주군을 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만나고 헤어지는 기준이 의로움에 있다 보니 주군을 버리는게 흠일 수도 없었다.

이정현의 주군을 향한 충성심도 과연 그러할까? 친박들의 청와대를 향한 애정도 그런 속성을 지니고 있는걸까? 그리고 주군이 의를 잃었다고 느낄 때, 세 번을 간(諫)한 뒤 듣지 않으면 울면서 떠나갈 사람이 그들 중 몇명이나 될까? 이정현은 “떼를 써서라도 청와대에 자주 찾아가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당당히 간하려는 마음자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따른다. 그리고 그 의문은 몇가지 이유들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비근한 예가 그의 대표 수락연설 내용이다. 사실 이정현의 대표 수락연설은 실망스러운 내용으로 일관했다. 그는 수락연설을 통해 ‘함께’를 강조하고 파벌전쟁 종언을 선언했지만, 20대 총선 참패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친박 패권의 청산을 말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언급됐어야 할 총선 참패의 원인 분석도, 대안 제시도 없었다. ‘개혁’과 ‘혁신’을 강조했지만, 개혁의 첫 단추인 당청관계의 재정립에 대해서도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박근혜 정부의 성공만을 강조하는 모순된 주장을 토해냈다. 열변은 있었으되 감동은 없는 연설이었다.

당선 다음날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나온 그의 발언들도 우려를 낳기에 충분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었다. 특히 “대통령과 정부와 맞서는게 정의인 것처럼 인식한다면 여당 의원 자격이 없다.”고 한 발언은 압권이었다. 애시당초 그의 뇌리에 당·정·청의 건강한 긴장관계에 대한 구상은 없었음을 드러내주는 발언이었다.    

여러 정황상 이정현의 대표 취임은 숱한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원인은 맹목적 충성심에 내포된 맹렬한 배타성이다. 그 대상은 당연히 김무성 전 대표를 축으로 하는 비박, 또는 비주류일 것이다. 이정현이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면 할수록 박근혜를 밟고 올라서서 대권 고지를 점하려는 김무성 등 비주류의 반발도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정현의 비주류에 대한 배척 움직임은 이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요 현안에 대한 최고위원회의 발언들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부터가 그렇다. 비공개 논의를 한 뒤 최고위원들의 발언 내용을 정리해 대변인을 통해 발표하겠다는게 새로운 방침의 골자다. 봉숭아학당 시비가 재연되는 것을 막고,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이려는게 그 취지인 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당내 비주류의 입에 재갈을 물려 반대 목소리를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로 의심된다. 이정현의 당선 이후 언행으로 보아 이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일사불란함만을 최고선으로 여기는 정당이라면 민주적인 정당이 아니다. 주권의식이 강한 공화국 시민들에게 왕조시대적 충성심은 아무래도 거북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는 요소다. 맹목적 충성심을 떨쳐내지 않는 한 이정현의 성공담은 밋밋한 이야기로 끝나기 십상이다. 결국 무수저의 쭉정이 출신인 이정현이 진정한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이제부터의 행동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성공적 줄서기와 맹목적 충성이 아닌, 순수한 열정과 노력이 성공의 동인이었음을 보여줄 때 비로소 이정현의 성공 신화가 완성되리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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