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전 KDB산업은행 회장이 얼마전 서울중앙지검에 슬그머니 출두해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 6월 대우조선해양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자 부총재로 있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휴직계를 내고 해외로 잠적한 지 8개월만이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낙하산 인사인 그는 검찰 수사를 피해 유럽·미국 등을 돌면서 도피생활을 하다 지난 2월 중순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변호사를 선임해 치밀하게 법적 대응을 준비해온 것으로 전해진 그가 탄핵 정국 와중에 검찰에 출두한 속셈은 불문가지다. 탄핵안을 둘러싸고 온 나라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어물쩍 넘어가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경제계 관계자는 “검찰 조사를 안 받을 수는 없으니 탄핵안을 둘러싸고 나라가 극심하게 혼란스러운 틈을 타 출두해 주목을 조금이라도 덜 받으려고 꼼수를 부린 것”이라고 비난했다.

검찰에 따르면 홍 전 회장은 대우조선이 2015년 5월 자체 조사로 회계 비리 정황을 파악해 3조원대 회사 손실을 공개했으나 제대로 된 회계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대우조선에 2조 2000억원을 지원해 산은에 엄청난 손실을 끼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대우조선은 부채비율이 7000%를 넘는 껍데기 뿐인 회사였다.

검찰은 “지난해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홍 전 회장을 업무상 배임과 직무유기 등 혐의로 고발한 사건과 관련해 피고발인 조사를 진행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의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다. 홍 전 회장은 지난해 6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15년 10월 중순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안종범 대통령 경제수석, 임종룡 금융위원장, 진웅섭 금융감독원장 등이 모여 (대우조선 지원을) 결정했으며 산은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며 책임을 떠넘겼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홍 전 회장은 2013년 KDB산은 회장에 발탁된데 이어 AIIB 부총재까지 맡는 등 탄탄대로를 달렸다. 부총재 내정 당시부터 실력과 자질보다는 ‘박근혜 경제교사’ 등 이력이 ‘빽’으로 작용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이를 증명하듯 정부와 상의 없이 제멋대로 AIIB 부총재직을 내던지는 바람에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정부는 AIIB에 37억 달러(약 4조 2272억원)를 내기로 약속하는 등 엄청난 공을 들인 끝에 얻어낸 부총재 자리를 홍 전 회장에게 맡겼다. 그런데도 그가 돌연 휴직계를 내 물의를 일으키자, AIIB는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곧바로 프랑스 출신 국장을 부총재로 승진시켜 한국 몫 부총재 자리를 없애버렸다. 국익을 해치는 것도 모자라 나라 망신까지 시킨 홍 전 회장은 사과는커녕 당장의 비난을 모면하려고 무책임하게 잠적해버렸다.

이런 자격미달의 인사를 요직에 임명한 것은 박근혜 정권의 짬짜미 인사 탓이다. 그가 부실기업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해야 할 산은 회장으로 임명됐을 때는 물론 풍부한 국제적 감각이 필요한 AIIB 부총재로 낙점된 직후 부적절한 인사라는 지적이 많았다. 지적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박근혜 정부의 검증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인사 참사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불상사를 막으려면 권력의 친소관계에 따른 낙하산 인사를 철저하게 배제하는 인사검증 시스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정부는 홍 전 회장이 잠적한 동안 ‘연락 두절’이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우조선 지원이 정부 결정이라는 말 때문에 그가 외국을 돌아다니도록 방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검찰이 홍 전 회장의 자진 출두 때까지 무슨 노력을 했는지도 궁금하다. 정권 실세가 그의 잠적을 눈감아 준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나도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홍 전 회장의 케이스는 낙하산 인사가 나라 경제 뿐 아니라 국제 경쟁력을 얼마나 좀먹고 심각한 해악을 끼치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표본이다. 검찰은 모든 의혹을 낱낱이 밝혀내야 한다. 먼저 대우조선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산은이 정말 들러리만 선 것인지 파헤쳐야 한다. 홍 전 회장이 산은 회장에 이어 AIIB 부총재직에 오르기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밝혀야 한다. 그리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련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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