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지표가 온통 잿빛으로 가득찼다. ‘고용 쇼크’와 ‘분배 참사’에 이어 소비 심리까지 꽁꽁 얼어붙는 바람에 연말 경제위기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국은행이 얼마전 발표한 소비자 동향조사에 따르면 8월 소비자심리지수(CCSI)가 100 아래로 떨어졌다. 가계의 체감경기를 보여주는 CCSI가 100 밑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해 3월 이후 1년 5개월 만이다. 생활 형편과 수입·지출 전망이 모두 비관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업이 인식하는 경기 상황을 알려주는 기업경기실사지수(BSI)도 하락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두 지표는 1년여 전 박근혜 정부 탄핵정국 당시 수준으로 후퇴했다.

사상 최악의 실업대란이 지속되는 고용통계에도 먹구름이 짙다. 지난달 취업자수 증가폭은 5000명에 그쳤다. 특히 제조업 일자리는 12만7000개가 날아갔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이다.

소득 양극화도 심화됐다. 통계청 가계동향 조사에 따르면 2분기 소득 1분위(하위 20%)의 가계소득은 전년 같은 기간보다 7.6% 줄어들었다. 2분기로는 15년래 감소폭이 가장 크다. 더욱이 1분위 근로소득은 15.9%나 곤두박질쳤다. 반면 5분위(상위 20%) 가계소득은 10.3% 증가했다.

하위계층의 소득감소도 문제지만 분배 실패는 더욱 뼈아프다. 최저임금을 2년째 두 자릿수로 올렸는 데도 하위계층의 근로소득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이 옳다면 하위계층의 소득 절벽을 설명할 방도가 없다. 소득주도성장론은 저소득층의 소득을 끌어올려 소비를 촉진시키는 방법으로 경기 선순환을 이루겠다는 정책이다. 저소득층의 소득이 증가하면 소비가 늘고, 소비가 늘면 생산이 증가하며, 생산이 늘어나면 일자리와 소득이 증가하는 선순환 고리가 이뤄진다는 논리다. 이번 통계는 소득주도 성장론이 허구라는 점을 날 것으로 보여주는 증표다.

사정이 이런 데도 정부와 여당은 현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겠다고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는 우리 경제정책 기조를 자신 있게 흔들림 없이 추진해달라”고 당부했다.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도 “소득주도성장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겠다”고 말했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대표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가 조화를 이루는 포용적 복지국가를 만들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나 국제노동기구(ILO) 같은 국제기구도 소득주도 성장을 권유한다”며 “정책기조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현실화된 고용과 분배, 소비·기업심리 충격에도 아랑곳없이 정책기조를 밀어붙이겠다는 점을 재확인해준 셈이다.

이쯤 되면 오기라고밖에 할 수 없다. 소득주도성장 실험은 무모하다. 실제 통계치로만 봐도 일자리를 줄인 것도 모자라 분배마저 악화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실험은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하다. 투자를 통해 경제 활력을 높여 고용을 늘리지 않으면 소득 양극화 해소 방법은 없다.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지 않으면 서민들만 고통스럽다.

청와대는 소득주도성장이 수십년 만에 경제정책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인 만큼 제대로 효과를 내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주장을 고장난 녹음기처럼 되풀이한다. 정부는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성장의 전부가 아니라 여러 정책수단 중에 하나일 뿐이며 실제로는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이기 위해 주거·의료·교육·교통·통신 등 주요 생계비 부담을 낮추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주장한다. 정부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숫자와 현실로 증명돼야 한다.

물론 최저임금 인상이 소득주도성장의 대표 정책으로 부각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으로 정부가 보듬어야 할 저소득층 근로자와 소상공인이 오히려 심각하게 타격받았다. 정부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정책을 언제까지 믿어달라고만 할 것인가.

미·중 무역분쟁과 중국의 기술 굴기(?起), 미국의 금리 인상 등으로 우리 경제 앞날은 가시밭길이 가로막고 있다. 실패한 정책에서 손을 떼는 데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 경제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 전에 조속히 정책 방향을 바꿔야 한다. 정부가 오기 부리듯 현 정책기조를 유지하는 한 경제회생의 돌파구를 찾기는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서울신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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