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 아현지사 화재사고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KT 아현지사 화재사고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 류수근
  • 승인 2018.12.0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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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Risk)’은 17세기 스페인의 항해술 용어에서 나온 것으로 ‘위험을 감수하다, 암초를 뚫고 나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용어에는 부를 얻기 위해서 당연히 감수해야만 하는 난관까지도 녹아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 기반의 지식정보혁명으로 대표되는 ‘제3차 산업혁명’은 20세기 후반, 인류에게 종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연결성과 편의성, 스피드를 가져왔다. 2010년대 중반부터는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등으로 대표되는 만물 초지능혁명 시대인 ‘제4차 산업혁명’이 도래했다.

자고 나면 바뀌는 IT 산업혁명은 ‘위험’의 개념도 하루가 다르게 바꿔놓고 있다.

지난달 24일 오전 지하 통신구에서 화재가 발생한 서대문구 충정로의 KT 아현빌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지난달 24일 오전 지하 통신구에서 화재가 발생한 서대문구 충정로의 KT 아현빌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독일의 세계적인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1997년 저서 ‘위험사회’에서 성공적인 근대화의 과정에서 초래된 정치·사회·경제·기술적 변화의 위험성을 기존의 자연적 재난과 차별화되는 개념에서 정립하였다.

울리히 벡은 현대 산업사회는 위험사회로 이행한다고 설파한다. 위험사회는 현대 사회가 존재론적으로 재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를 이룩한 근대 산업사회의 원리와 구조 자체가 파멸적인 재앙을 근원화해왔다는 주장이다.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의 위험은 방사선과 같이 인간의 평상적인 지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봤다. 현대 위험의 또 다른 특징은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위험의 분배 및 성장에서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위험이 사회적 지위를 강화 또는 약화하는 배경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달 24일 낮 긴급재난문자가 스마트폰 메시지로 날아들었다.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사고 건이었다.

이례적인 메시지였다. 어떤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해서 시민을 대상으로 긴급재난문자를 날리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올해 8월부터 통보받은 ‘긴급재난문자’를 살펴봤다. 폭우, 홍수, 산사태, 지진, 미세먼지 등 기상이변과 관련된 안전 주의 당부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정보들은 접하는 순간 누구나 그 위험성을 직관적으로 느낀다.

하지만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사고와 관련된 긴급재난문자는 달랐다. 메시지를 받고 아리송하게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뭔가 전화나 통신에 영향이 있는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더라도 그 여파가 얼마나 클지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KT 아현지사 화재사고 후 쏟아진 급박한 보도들은 스마트폰 등 유·무선 통신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는 2018년 우리들을 혼돈에 빠뜨렸다. KT 아현지사 화재로 인해 서대문과 마포 일대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일상이 멈춰섰다.

서울 중구, 용산구, 서대문구, 마포구 일대에서 KT가 제공하는 휴대전화, 초고속인터넷, IPTV 서비스 등에 통신장애가 발생했다. KT 통신망을 사용하는 카드 단말기와 POS(판매시점 정보관리 시스템)가 먹통이 됐다.

카드결제는 물론 금융거래, 내비게이션, 음악재생 등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시민들은 공황에 빠졌다. 특히, 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영업자들에게는 치명타였다. 불통에 따른 1차 피해보다 영업 손실 등 2차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재난 수준’이다. 울리히 벡이 ‘위험사회’에서 경고한 ‘위험성’이 떠오른다. 우리들의 평상적인 지각능력을 완전히 벗어난 위험이었고,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자영업자 등 그날그날 벌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이다.

사고 후 일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주변 상인들은 여전히 피해 복구가 덜 돼 영업에 차질을 빚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다. 1일까지 소상공인연합회 피해접수 신고센터에 200여건의 피해 신고가 접수됐다. 상점별 피해액은 최소 50만원에서 최대 600만∼700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상액은 실제 피해액과는 큰 차이를 보일 전망이다. KT 이동전화와 초고속인터넷 약관에는 고객 책임 없이 연속 3시간 이상 서비스를 받지 못하면 시간당 월정액(기본료)과 부가사용료의 6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기준으로 고객과 협의를 거쳐 손해배상을 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자 등 피해자들이 2차로 받는 영업 손실 등은 보상 규정에 없다.

KT 아현지사 화재사고는 그 원인이 알려지며 분노를 넘어 허탈함으로 다가왔다.

통신산업은 국민 자산인 주파수를 빌려서 사용한다는 점에서 공공재 성격이 강하다. 그럼에도 KT아현지사는 이렇다할 화재예방시설이나 통신 백업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KT아현지사는 정부재난관리 매뉴얼상 A·B·C 등급보다 중요하지 않은 D등급 시설로 분류돼 백업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통신사는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시설과 이용자의 정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서비스 지연을 최소화해야 하는 게 기본 명제다. KT는 물론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 통신대란을 잉태했다고 볼 수 있다.

KT 아현지사 통신구에는 전화선 16만8000 회선, 광케이블 220조가 설치됐다고 한다. 이 정도 규모의 통신시설에 백업이나 이중화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없다는 매뉴얼이라면 그것을 재난관리 매뉴얼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욱 아연실색케 하는 건, 해당 시설에 스프링클러나 경보기 등 기본적인 화재 방지시설도 없이 소화기 1대만 비치돼 있었을 정도였다는 믿기 어려운 보도다. ‘우리 건물에는 재난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기만이 아니고서야 기간통신망을 이처럼 허술하게 관리할 수 있을까. ‘예고된 인재’였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통신 안전을 논할 때 해킹 등으로부터 시스템을 지키는 ‘보안’과 사생활 정보를 보호하는 ‘개인정보보호’, 두 가지 측면만을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번 KT 아현지사 화재는 네트워크 관리가 그보다 더 선행돼야 할 과제임을 깨닫게 했다. 네트워크의 안전성 확보는 모든 통신시스템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인프라이기 때문이다. 기본 골격이 허술한데 총체적인 안전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인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이 지난달 28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로부터 제출받은 'D등급 통신시설 지역별 시설현황'에 따르면, 전국 D등급 통신시설은 모두 835곳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신사별로는 KT 354곳, LG유플러스 187곳, SK텔레콤 131곳 순이었다.

통신 3사는 지난 1일 0시를 기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6대 광역시 중심지 등에서 차세대 이동통신 5G 상용화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개시했다. 5G의 전송 속도는 LTE의 최대 20배인 20Gbps에 이르고, 한꺼번에 전송할 수 있는 데이터양도 100배 크다. 정말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KT 아현지사 화재사고의 여파로 통신 3사는 5G서비스 공개행사를 조촐하게 진행해야 했다.

‘제4차산업혁명을 이끄는 5G 선도국가 대한민국’, 하지만 단 한 건의 지하건물 화재사고로 일상이 마비된 'IT강국‘을 떠올리면 그 화려한 명성이 무색하게만 느껴진다.

울리히 벡은 근대산업사회가 파생시킨 예측불허의 위험성을 막기 위해서는 ‘성찰적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어떤 단계의 산업화든 간에 그 과정이 위험사회로 귀착되는 과정을 되짚고 반전시키려는 목표의 필요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사고는 'IT강국‘이라는 명성에 취해온 대한민국에 호된 채찍을 안겼다. 중요한 기간통신망의 백업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한 '외양만 화려한 IT강국‘이 아니라, 안전의 기본부터 챙기는 ’내실 있는 진정한 IT강국‘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삼기를 바란다. ’통신 안전‘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류수근 IT21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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