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대학교 사회심리학자인 헬렌 조페 교수는 ‘위험한 사회와 타자의 논리’(원제: Risk & 'The Other')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존재인지를 고발했다. 인간에게는 ‘위험한 것’은 모두 우리가 아닌 타인들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조페 교수는 그 예로 성병이 유럽을 풍미했던 15세기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소개했다. 성병은 유럽 각국 사람들에게 ‘우리 것’이 아니라 ‘타인들의 것’이었다. 영국인들에겐 프랑스 병이었고, 프랑스인들에겐 독일 병이었다.

우리는 위험하지 않고, 언제나 안전하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우리만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남들은 몰라도 우리는 안전하다’ 혹은 ‘우리는 깨끗하다’라는 생각에 숨겨진 위험 요소는 마술과도 같은 힘을 지닌 집단 편견이다. 집단 편견은 필히 공멸을 부른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 = 연합뉴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 = 연합뉴스]

최근 청와대 김의겸 대변인이 브리핑 도중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숱한 뒷말을 낳았다. 민간인 사찰 의혹을 부인하기 위한 반론 치고는 너무나 비논리적이어서였다. 그건 국가기관의 대변인 브리핑이 아니라 무작정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여항간 다툼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었다.

물론 이 말은 김 대변인이 청와대 민간인 사찰 시비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는 브리핑 중 마지막 일부분을 차지했다. 일종의 클로징 멘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 대변인이 갖는 무게를 생각하면 가볍게 들어넘길 수는 없는 말이었다.

이 말엔 중요한 단서 하나가 숨어 있다. 문재인 정권 출범 후 정치적·경제적, 때론 외교적으로 국내에서 마찰음이 가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단서 말이다. 그건 곧 앞서 말한 집단 편견이다. ‘우리는 언제나 안전하고 깨끗하고 정의롭다’는 집단 편견이 ‘위험하고 불결한데다 정의롭지도 못한’ 야당 등 외부 집단과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원흉이다.

빈번히 국회 청문회를 무시하고 강행되는 장관 임명도, 대통령이 그런 장관에게 임명장을 주면서 “청문회 때 시달린 분들이 일을 더 잘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되돌아보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청문 절차를 묵살하는 것도 모자라 대의기관을 비웃는 듯한 그 같은 발언의 배경을 이해할 길이 없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민간인 사찰 의혹은 돌이킬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 듯 보인다. 피의자인 김태우 검찰 수사관이 검찰 수사와 기소, 그리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폭로를 쏟아낼 지 가늠하기 어려워서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특감반 의혹 진상조사단을 꾸린 뒤 폭로를 이어가는 것도 사건의 폭발성을 키우는데 일조하고 있다.

청와대가 “비위 행위자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적극 부인하지만 시중에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 김 수사관이 작성했다는 ‘첩보이첩 목록’에 이어 정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관련 동향을 정리한 문건까지 공개된 탓이다. 한국당은 후자의 문건을 ‘블랙리스트’라 부르고 있다. 이제 민간인 사찰 의혹은 일반 시민사회에서 합리적 의심 단계에 접어들었다.

김 수사관의 연이은 폭로와 한국당의 공격 과정에서 나온 것 중 가볍게 볼 수 없는 자료는 역시 ‘첩보이첩 목록’이다. 이 목록은 김 수사관이 주장하기를, 자신이 수집한 뒤 절차를 거쳐 수사 기관으로 이첩됐다는 첩보의 목록이다.

여기엔 교수와 언론인, 정치인에 기업인까지 망라돼 있다. 김 수사관은 목록에 나온 보고서들은 텔레그램을 통해 일일이 상관의 지시를 받은 뒤에 작성한 것들이라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가 김 수사관으로부터 제출받은 민간인 관련 첩보를 검찰에 이첩한 실제 사례도 확인됐다.

또 하나 합리적 의심을 자극하는 부분은 김 수사관이 청와대에서 이런 행태를 유지하면서 1년 5개월을 ‘별 탈 없이’ 근무했다는 점이다. 그토록 진급 욕심이 강하다는 사람이 엄한 상사의 지시를 어겨가며 장기간에 걸쳐 하지 말라는 짓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다.

더구나 김 수사관은 첩보 범위를 벗어난 동향 파악은 자신만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정도면 김 수사관을 엄벌한다 해도 민간인 사찰 의혹을 둘러싼 국민적 궁금증은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지금 청와대의 모습은 정윤회 문건 파동 당시의 박근혜 정권 청와대와 너무도 닮아 있다. 국민이 보기에 사건의 본질은 폭로된 문건(첩보이첩 목록 등)의 내용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문건 유출 행위만을 크게 문제시하고 있다. 유출 행위에 문제가 있으면 처벌해야 하지만, 그건 국민들 눈에 곁가지로 비쳐질 뿐이다.

민간인 동태를 담은 첩보 내용과 관련해 ‘불순물’ 운운하며 내놓은 청와대의 이현령비현령식 해명도 의혹을 키우는 요인이다. 김 수사관의 근무 기간 중 이뤄진 ‘불순물 유입’과 민간인 사찰의 경계가 청와대의 해명으로 더욱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해법은 결자해지의 마음으로 청와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더 이상 김 수사관을 뉴스 메이커로 띄우지 말고 청와대가 모든 사실을 공개한 뒤 검찰 수사를 자발적으로 요구하는 게 최선일 듯 싶다. 유전자 운운하며 자신들을 정의의 무리라 자칭하고, 김 수사관을 ‘6급 주사’, ‘미꾸라지’로 내리꽂는 것은 유익하지도 도의적이지도 않다. 이 문제는 국민을 향한 그런 식의 감성적 소구(訴求)로 풀릴 일이 아니다.

좋든 싫든 이 사안은 이미 진실게임이 되어버렸다. 김 수사관은 자신과 감찰반 상사가 메시지를 주고받은 텔레그램 기록이 청와대에 의해 임의로 삭제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 사태는 더욱 난해한 진실게임이 되어 버렸다.

진실게임을 깔끔히 마무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진실을 찾아내는 일이다. 따라서 감찰반장의 스마트폰 등에 텔레그램 기록이 일부라도 남아 있다면 그 자료도 공개돼야 한다. 그 첫걸음은 민정수석실 전반에 대한, 제대로 된 압수수색이다. 청와대 본청 밖 별관에 대한 ‘택배식’ 압수수색은 누가 봐도 눈가리고 아웅이다.

군사기밀 시설임을 운위하며 더 이상의 압수수색을 거부하는 것은 당당한 행동이 아니다. 그건 추상 같은 공권력이어야 할 대한민국 검찰을 앞뒤 없이 날뛰는 시정잡배쯤으로 여길 때나 가능한, 박근혜 정권식의 논리다.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 전면 허용이야말로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권과 유전자가 다르다는 점을 보여줄 결정적 용단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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