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 영국과 유럽연합(EU) 간에 마련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합의안이 영국 하원의 승인을 얻는데 실패했다. 아무런 합의내용 없이 영국이 EU에서 떨어져나가는, 이른 바 ‘노딜 브렉시트’가 현실화될 가능성에 한 발 더 다가선 것이다.

비록 예견됐던 일이지만 합의안 부결은 하나의 ‘그레이 스완’이었다. 예상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악재라는 뜻이다.

부결은 둘째 치고 찬반 표차가 예상 외로 크다는 점은 영국과 EU는 물론 관전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표결 전 분석가들은 일제히 부결을 점치면서도 반대표가 찬성표를 100표 이상 앞서지 않는 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받을 정치적 충격이 덜 할 것이라 예상했다. 이 경우 심각한 정치적 혼란 없이 메이 총리가 수정안을 마련해 EU와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브렉시트 합의안 부결 이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브렉시트 합의안 부결 이후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하지만 표결 결과는 찬성 202표, 반대 432표로 230표 차 부결이었다. 메이 총리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완전한 정치적 패배였다. 집권 보수당의 의석이 317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당 내부에서도 반발표가 적지 않게 나온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1 야당인 노동당은 표결 결과가 나오자 곧바로 정부 불신임안을 제출했다. 하원은 16일 오후 7시(한국시간 17일 새벽) 불신임안 표결을 실시한다.

메이 총리는 합의안 부결 직후 성명을 발표하고 표결 결과 수용 의사를 밝혔다. 그러면서 만약 정부가 신임을 다시 얻는다면 의회 내 각당 지도부와 합의안 통과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새로운 합의안 마련을 위해 EU와 재협상을 벌일 용의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메이 총리는 이와 별개로 의회 규정에 따라 21일까지 ‘플랜 B’를 제출키로 했다.

만약 불신임안이 하원을 통과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후 14일 이내에 새로운 내각에 대한 신임투표가 하원에서 실시되는데, 이것이 부결되면 영국은 곧바로 조기총선 국면에 돌입한다. 이 와중에 영국은 EU와의 협상 주체를 한동안 결정짓지 못하게 된다. EU로서도 하릴 없이 총선 결과가 나오기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을 맞이해야 한다.

문제는 영국이 이미 EU에 탈퇴를 통보했기 때문에 EU 규정에 따라 통보 후 2년째가 되는 오는 3월 29일 자동 탈퇴가 이뤄진다는 데 있다. 이 점이 ‘노딜 브렉시트’에 대한 우려와 두려움을 키우고 있는 주요 배경 중 하나다.

‘노딜 브렉시트’의 심각성은 탈퇴 후 적응을 위한 연착륙 기간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데서 비롯된다. 영국과 EU는 탈퇴협정에서 브렉시트의 연착륙을 위해 21개월간의 이행 기간을 두기로 약속했다. 3월 브렉시트 이후에도 당분간은 영국이 EU 회원국에 준하는 대우를 받도록 규정돼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합의안에 따라 브렉시트가 원만히 이뤄졌을 때의 얘기다. 다시 말해 ‘노딜 브렉시트’에는 위의 연착륙 기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노딜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곧바로 유럽에서 왕따 신세로 전락한다.

당장 영국과 EU 사이에 두툼한 장벽이 생겨 통행이 제한되고, 물자 유통시 새로운 통관절차에 의해 관세가 부과된다. 이로 인해 물류에 제한이 생기면서 영국의 산업 발전이 지장을 받는 한편 생필품 부족 현상이 벌어질 수 있다. 원자재 및 부품 등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면 영국 제조업체들의 생산 비용이 올라가고, 이는 곧 소비자물가의 급격한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 같은 우려가 번지면서 영국 곳곳에서는 벌써부터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EU 역내에 흩어져 있는 영국인들의 법적 지위에도 변화가 생긴다. 자칫하면 학업 및 산업활동을 위해 역내에 체류 중인 영국인들의 귀국 러시가 이뤄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노딜 브렉시트는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이 유럽에서 외톨이가 됨에 따라 EU의 이름으로 체결된 기존의 자유무역협정(FTA)들과 무관해지기 때문이다. 오직 다자 무역협정인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율만 적용받게 된 영국은 EU는 물론 다른 개별 국가들과도 일일이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양자 무역협정을 체결해야 한다.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지난해 기준 한국과 영국의 교역규모는 사상 최대치인 144억4000만 달러(약 16조2000억원)에 달했다. 그 바탕엔 한·EU 간 체결한 FTA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딜 브렉시트’가 실현되면 영국과 이뤄지는 교역에서는 기존의 관세규정이 무용지물로 변한다.

그 결과 한국 기업들은 크게 인상될 것이 뻔한 관세를 물면서 영국으로 물건을 수출해야 한다. 보다 복잡해질 통관 절차를 거쳐야 하고, 상품 및 서비스에 대한 인증을 새롭게 확보해야 한다는 점 등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이 같은 애로는 한·영FTA가 체결되는 순간까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황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발 빠르게 대처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만이 피해와 혼란을 최소화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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