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경제정책과 관련해 요즘 들어 부쩍 자주 들리는 말이 공정경제다. 소득주도성장 논쟁이 주춤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엔 공정경제가 새로운 의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공정경제는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과 함께 문재인 정부가 제시한 경제정책 3축 가운데 하나다. 정권 초기엔 소득주도성장이 경제정책의 주축인 듯 행세했으나,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함께 논란에 휩싸이면서 잊혀진 이름이 되다시피 했다. 이젠 문재인 대통령조차도 공개 석상에서 소득주도성장을 거의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분배론자로서 소득주도성장 정책을 진두지휘한 장하성씨가 청와대 정책실장에서 물러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 전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마저 설화로 물러났으니 이제 소득주도성장은 사공 잃은 배가 됐다.

대신 공정경제란 말은 새로운 화두인 양 요즘 문 대통령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고 있다. 경제부총리가 주도하는 혁신성장이 예나 지금이나 여권 지도부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사실 공정은, 혁신도 마찬가지이지만, 합목적적 개념이라기보다 당위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단어다. 어느 나라 어느 정부도 불공정한 방법으로 반혁신적 성장을 하려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정경제나 혁신성장이 특정 정권의 경제정책으로 불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일까 하는 의문을 품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공정경제에 관한 한 그 같은 의문은 말끔히 해소됐다. 그 단초를 제공한 이는 문 대통령이었다.

지난 23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공정경제추진 전략회의’를 주재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이 회의는 두 달 전쯤인 지난해 11월 처음 열렸다. 그러므로 외견상 두 번째이지만 ‘공정경제추진 전략회의’라는 이름으로 회의가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달 전 회의의 명칭은 ‘공정경제 전략회의’였다. 장소도 청와대가 아닌 외부 시설이었고, 참석자들도 기업인 등 민간인들이 주축이었다.

이번 회의에는 문 대통령과 경제정책에 관여하는 청와대 비서진,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포함하는 경제부처 장관들이 참석했다. 첫 회의가 민간의 의견을 구하는 자리였다면 이번 회의는 정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공정경제 추진 전략을 논의하는 마당이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나온 대통령의 메시지는 정부 바깥의 경제 주체들, 특히 대기업에 우려와 불안감만 안겨주었다. 공정경제가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이어 기업을 옥죄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될 것임을 시사했기 때문이다.

그간 현 정부의 공정경제 구호는 독점 규제를 강화하고 경쟁의 공정한 룰과 소비자 주권을 확립하는데 이전 정권보다 큰 가치를 둔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인식돼왔다. 그 역할을 앞장서서 맡아온 이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다. 그러잖아도 김 위원장은 공정위장 취임 이전부터 기업인들 사이에서 ‘저승 사자’, ‘재벌 저격수’ 등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가 취임한 이래 공정경제 정책 시행은 그의 주도 하에 이뤄지는 것으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공정경제추진 전략회의에서 나온 문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세간의 인식을 뛰어넘었다. 공정경제 정책 이행의 한 방안으로 스튜어드십코드를 들고 나온 탓이었다. 이는 공정경제 정책이 범정부 차원에서 전방위적으로 시행될 것임을 예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문 대통령은 “공정경제를 위해서는 대기업의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정부는 대기업 대주주의 중대한 탈법과 위법에 대해서는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를 적극 행사하여 국민이 맡긴 주주의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틀린 것은 바로잡고 반드시 그 책임을 묻겠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공정경제 정책을 대기업에 대한 징벌적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발언이 있던 날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위)는 한진칼과 대한항공을 상대로 스튜어드십코드를 적용할지 여부를 논의했다. 회의 결과는 반대 의견 우세였고, 수탁위는 회의 결과를 그대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주도하는 기금운용위원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난감해진 곳은 기금운용위다. 이달 초 최종 결론을 내려야 하는 기금운용위로서는 수탁위 회의 결과를 수용하는 게 상식적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미리 답을 정해주듯 강한 메시지를 날렸으니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닌 듯 싶다.

이로써 공정경제는 이제 대기업들에겐 새로운 칼로 인식될 수밖에 없게 됐다. 나름대로 스튜어드십코드의 적용 원칙을 세운다지만 대기업은 소득주도성장에 치이고 공정경제에 받히는 꼴이 됐다. 벌써부터 스튜어드십코드를 두고 “소잡는 칼”이란 말까지 등장했다.

현재 국민연금은 637조원의 자산을 운용하면서 이 중 100조원 이상을 국내 주식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포스코, KT, KT&G 등 굴지의 기업치고 국민연금과 무관한 곳은 없다. 앞에 언급된 각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식 지분은 10%를 넘나든다. 국민연금 지분이 5%를 넘어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시 주요 타깃이 될 상장사만 대략 300곳에 이른다.

스튜어드십코드란 이름으로 추진될 공정경제 전략은 그 자체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그 취지와 명분을 탓할 수는 없다. 문 대통령 스스로 말했듯이 현 정부의 경제정책 3축 가운데 그나마 가장 평가가 좋았던 것이 공정경제인 것도 사실이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경직적이고 무차별적인 정책 집행이 몰고 올 부작용이다. 명분은 좋지만 청와대가 말하는 공정경제의 개념은 누가 봐도 경제 활성화와는 거리가 멀다.

글로벌 경기의 부진 속에 올해 한국 경제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맞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니 이 시점에서 정부가 역량을 집중해 제1의 목표로 삼아야 할 일은 경제 활성화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아메리카 퍼스트’를, 이웃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디플레이션 탈출’을,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국몽 실현’을 외치며 추구하는 목표도 결국은 경제 활성화로 귀결된다. 심지어 친기업 행보와 유류세 인상 등으로 자국민들에게 뭇매를 맞고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경제정책 목표도 경제 활성화에 맞춰져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만 경제 활성화의 주역인 대기업들에게 공정경제란 이름 하에 징벌적 핸디캡을 새로 부과하려 하고 있으니 볼수록 답답하다. 경제정책의 지향점이 경제 활성화여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다. 정책 입안자들은 그 같은 기본상식을 너무 오래 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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