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었던 윤한덕씨가 별세한 지 열하루가 지났다. 지난 4일 응급의료센터장 사무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윤씨에 대해 경찰은 1차 검안 결과 급성 심정지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윤 센터장의 사망을 두고 의료계 안팎에서는 과로사라 판단하고 있다. 업무가 곧 삶이었던 윤 센터장이 퇴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가족들조차 윤 센터장과 연락이 되지 않았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이틀이나 지난 뒤에서야 병원을 찾았을 정도다.

의료계의 과다한 업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법적으로도 36시간 연속근무가 가능하다는 전공의들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지난 1일 24시간 연속 일을 하다 숨진 채 발견된 인천 가천대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A씨의 사연은 윤 센터장의 사망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경종을 울렸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몸 3개, 머리 2개였어야 했다”는 윤한덕 센터장의 생전 끄적임은 비단 의료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대중문화 산업 종사자들도 이와 비슷한 강도의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

최근 필자는 홍보 대행사 와이트리 컴퍼니에서 일하는 관계자들과 만났다. 올해 9년 차에 접어든 B 실장은 이 자리에서 무려 8주 동안 휴가를 떠났던 일화를 꺼냈다.

“큰맘 먹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6주 정도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보내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차가 있었지만, 눈을 뜨면 메시지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죠. 사실 한 달 동안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고 갔는데, 도저히 여행을 즐길 수 없는 수준이 됐어요. 결국 중간에 유심칩을 새로 사서 갈아 끼웠습니다. 전화라도 안 받고 싶었거든요.”

당시를 떠올리며 미안함을 내비친 C 과장은 새벽에 출근해 새벽에 퇴근하는 게 일상이라고 전했고, 다른 직원들의 고충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필자와 헤어질 때 시곗바늘은 이미 오후 9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이날 B 실장과 C 과장은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언론과 현장을 이어주는 홍보사 직원들의 노동 강도는 심각한 수준이지만 방송계에선 이만하면 양반이다. 이들이 프로그램 방영 직전까지 종종 찾는 촬영 현장의 사정은 더욱 열악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8월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와 함께 공개한 드라마 촬영 일지에는 이들의 고충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지난해 큰 성공을 거둔 드라마 tvN ‘아는 와이프’의 경우 촬영일 16일 중 5일은 20시간을 넘게 촬영이 진행됐다. 18시간 이상 촬영이 이뤄진 날은 11일에 달했다. 가장 짧은 촬영이 12시간이었다는 건 대중에겐 믿기 힘든 현실일 것이다.

종편 채널들은 사정이 다를까. 지난해 10월 1일 처음으로 방영됐던 JTBC ‘뷰티 인사이드’의 경우 9월 30일 오전 6시 30분에 첫 촬영을 시작해 다음 날 오전 4시 정각에 촬영을 마쳤다. 총 근무시간은 끔찍하게도 21시간 30분이었다. 이어진 촬영에서도 상황은 비슷했다. 10월 2일 촬영의 경우 15시간 30분 동안 진행됐고, 3일엔 20시간 4분, 4일에도 20시간 50분의 촬영이 강행됐다.

지상파도 상황은 비슷하다. SBS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의 경우 23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업무가 이어졌다. 심지어 꼬박 하루를 샌 스태프들은 이후 2시간 미만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바로 촬영을 재개했다.

비슷한 시기 방영된 같은 채널의 월화드라마 ‘서른이지만 열일곱입니다’에서는 포커스플로어 스태프 D씨가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던 당시, 5일간 야외에서 76시간에 달하는 노동에 시달린 끝에 사망한 그를 두고 동료들은 명백한 과로사라며 사측의 해명을 요구했다.

방송업계 종사자들의 삶과 죽음은 맞닿아 있다. “죽을 것 같이 일하면 진짜 죽는다”는 방송업계 사람들의 외침은 업계에 잠시나마 몸담아본 사람이라면 농담처럼 들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이는 비단 종사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데 그치지 않는다. 과다한 업무로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MBC에서 오랜 기간 드라마 PD로 재직 중인 지인 E는 결혼 이후 일과 육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다. 의사인 남편과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리는 자신 사이에 아이를 갖는 유일한 방법은 일을 관두는 것이라며 치열하게 고민했다. E는 일을 택했고, 불혹을 훌쩍 넘어선 지금도 둘 사이엔 아이가 없다.

2016년 방영된 tvN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이한빛 PD가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해 7월 직원 300명 이상 규모 방송사에 주당 최장 68시간 근무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조항이 신설됐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건, 이를 지킬 수 있는 업무 환경이다.

과연 의료업과 방송업은 ‘사람을 갈아 넣어야’만 유지가 가능한 걸까. 환자와 카메라 뒤에서 고통받는 두 업계의 씁쓸한 평행이론이다.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