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마침내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총재는 그 동안 실기했다는 비판과 함께 금리를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는 동안에도 기조 변화 기미를 보이지 않았었다.

이 총재는 12일 한은 창립 69주년을 맞아 기념사를 낭독하면서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경제 상황 변화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나가야 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전에 하지 않았던 표현으로, 상황 변화에 맞춰 금리를 조정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된다. 현 시점에서의 금리 조정은 인하를 의미한다.

앞서 이 총재는 “금리 인하를 검토해야 할 상황은 아니다”(4월 1일) 또는 “금리 인하로 대응할 상황은 아직 아니다”(5월 31일)라고 말하며 금리정책에 당분간 변화가 없을 것임을 시사했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러나 이날 이 총재는 미·중 무역분쟁, 반도체 경기 등 대외 요인의 불확실성이 크게 높아진 만큼 그 전개 추이와 영향을 면밀히 점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미·중 무역분쟁이 심화하면서 세계교역이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반도체 경기의 회복이 예상보다 지연될 소지도 있다”고 진단했다. 지난 4월만 해도 이 총재는 “하반기부터는 (주요국의) 수요가 살아나며 반도체 경기도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그 같은 전망은 그간 금리 동결의 명분으로 작용했다.

이 총재는 반도체 경기의 회복 지연, 미·중 무역분쟁 심화 등으로 대외 환경이 크게 달라졌음을 거론하면서 “성장경로의 불확실성은 한층 커진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이어 “특정 산업 중심의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우리 경제로선 이 같은 불확실성 요인이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따라 성장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경제성장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진단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낮출 가능성을 내비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은의 올해분 기존 전망치는 2.5%다. 수정 전망치는 다음달 18일 발표된다. 한은은 지난 4월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의 2.6%에서 2.5%로 낮춘 바 있다. 당시의 하향 조정만 해도 이미 네 번째로 기록돼 있다.

한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우리 경제가 단기 예상조차 뛰어넘을 정도로 급격히 악화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총재는 “저출산·고령화, 주력산업의 경쟁력 약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등 우리 경제의 성장을 제약하는 구조적 요인들이 상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가계부채는 최근 증가세가 다소 둔화했지만, 총량 수준이 매우 높고 위험요인이 남아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에 대한 경계감을 아직 늦출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이어 “신성장동력 발굴, 고부가가치 서비스업 활성화, 노동시장 유연·안정성 제고, 규제 합리화를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총재는 기념식을 마치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미·중 무역분쟁과 반도체 경기가 당초 예상보다 어려운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을 두고 향후 금리 인하를 시사한 것이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총재는 “통화정책 방향 관련 메시지는 창립기념사 문안을 그대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고 에둘러 말했다.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