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어야 한다. 한 국가의 정체성과 안녕질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사법부가 최후의 보루라면, 통화정책에 관한 한 굳건히 중심을 잡아야 하는 마지막 보루는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다. 사법부 못지않게 중앙은행은 독립성 확보와 관련해 강한 기대와 요구를 걸머지고 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스스로 지키려 노력할 때 더욱 탄탄해진다. 그렇게 할 때라야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도 높아지게 된다. 지루하고 피곤한 중국과의 싸움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성공으로 국민적 지지를 높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아무리 약(弱)달러와 금리 인하의 필요성을 강조해도 연방준비제도(연준)가 꿈쩍도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 = 연합뉴스]

중앙은행이 시장의 신뢰를 잃으면 통화정책은 더 이상 약효를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통화정책의 효력 상실은 시장에 불확실성을 키움으로써 투자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의 확산은 경제 전체를 망가뜨리는 악재 중의 악재다. 오늘날 미·중 갈등으로 불확실성의 강도가 하루하루 변할 때마다 자본시장이 널뛰기를 하고 있는 것이 그 같은 이치를 웅변해준다.

지난 12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느닷없이 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해 이런저런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 총재의 금리 인하 시사 발언은 굳이 통화정책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인 한은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나왔다. 그런 만큼 이 총재의 발언이 미친 충격 강도와 파장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 총재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분간 금리 변화가 없을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었다. 지난달 31일의 “금리 인하로 대응할 상황은 아직 아니다”란 발언이 대표적이다.

더욱 묘한 점은 여당 원내대표가 사실상 금리 인하를 주문하는 발언을 한지 불과 이틀 뒤에 이 총재가 금리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사실이다. 한은 창립기념 행사 이틀 전인 지난 10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고위 당·정·청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재정정책 외에 금융통화정책의 마련 역시 확장정책을 펴는데 필요한 요소”라고 말했다. 누가 듣더라도 한은을 향해 금리 인하를 촉구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이 총재의 발언을 이 원내대표의 그것과 연계시키는 것이 무리라는 반박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 반박이 사실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그러나 오비이락 가능성을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개운치 않은 뒷맛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여당 원내대표의 주문 말고는 이 총재가 왜 갑자기 입장을 바꾸었는지 그 이유를 찾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 상황 변화를 이유로 들먹이기엔 지난달 말 이 총재 발언의 여운이 너무 짙게 남아 있는 시점이다.

사실 이 총재가 지난해 11월 말 기준금리를 1.75%로 올린 것을 두고도 뒷말이 무성했었다. 당시엔 부동산 안정화에 올인하던 정부 쪽에서 금리 인상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강하게 형성돼 있었다. 그해 9월 중순 이낙연 총리는 국회 답변을 통해 “이 문제(금리 인상)에 대해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됐다”고 발언해 논란을 초래한 바 있다.

당시 전문가들 중엔 한은이 금리를 인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리는 쪽을 선택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이도 적지 않았다. 금리 인상 시기를 놓친 한은이 경기 부양을 위해 내려야 할 시기에 청개구리처럼 금리 인상 카드를 꺼냈다는 비판도 제기됐었다. 비판이 거셌던 만큼 한은의 결정을 이 총리의 발언과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목소리도 작지 않았다.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들은 통화정책 당국자로서의 이 총재와 한은의 권위 및 신뢰에 손상을 입힐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권도 한은 독립성 보장을 위해 인내하고 노력해야 한다. 정부가 통화정책 운용에 미주알고주알 훈수를 두는 일이 잦아질수록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정작 한은이 정치적 입김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통화정책을 시행하더라도 그 정책을 두고 공연한 시비가 일어날 수 있어서이다. 이번 일이 그와 유사한 케이스일 수도 있다.

지난 번 금리 인하 결정과 이번 이 총재의 발언이 연이은 오비이락이길 바랄 뿐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