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여름철 전기요금 폭탄에 따른 국민적 원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사실상 확정했다. 혹서기인 7, 8월에 한해 전기요금 누진 구간을 확장해 최대한 많은 가구가 요금 인하 혜택을 누리도록 한다는 게 핵심이다. 이번 조치는 임기응변식으로 행해오던 여름철 전기요금 부담 완화를 제도화한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민관 합동 태스크포스(TF)가 8차례의 회의를 거쳐 마련한 이번 누진제 개편안은 전기 소비 패턴을 고려해 각 구간의 소비량 상한을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즉, 구간별 상한을 1구간은 200kWh에서 300kWh로, 2구간은 400kWh에서 450kWh로 높인다는 것이 핵심이다. 기존의 누진제는 단위요금을 사용량 200kWh까지의 1구간엔 93.3원을, 201~400kWh인 2구간엔 187.9원을, 401kWh 이상의 3구간엔 280.6원을 적용하고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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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편안대로라면 지난해 사용량 기준으로 1629만 가구가 혹서기에 월 평균 1만142원의 전기요금 할인혜택을 누리게 된다.

이번 개편안은 한전 이사회의 전기요금 공급약관 개정과 정부의 승인 절차를 거쳐 확정된다. 절차가 남았다곤 하지만 이 개편안은 정부의 지원을 업은 TF가 마련한 것인 만큼 그대로 확정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주관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개편안 마련 취지와 관련, “가능한 한 많은 가구의 전기료 부담이 완화된다는 점, 현행 누진제의 기본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요금체계 개편으로 요금 부담이 늘어나는 가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이번 개편안 선택의 이유가 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제도를 두고 비판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총선을 앞두고 마련된 포퓰리즘 정책의 하나란 정치적 비판도 나온다.

포퓰리즘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접어두더라도 정부의 전기요금 개편안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처음부터 전기요금을 깎아주는데만 초점을 맞춘 가운데 논의가 이뤄져 나온 결과물이 이번 개편안이기 때문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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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요금을 깎아주겠다는데 싫어할 국민은 아무도 없다. 기후변화로 갈수록 견디기 어려워지는 여름철 무더위를 재난으로, 냉방시설 사용을 복지로 각각 인식하고 그 같은 콘셉트에 맞는 정책을 펼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전기료 할인으로 인해 발생할 한전의 손실을 메워줄 재원 마련 대책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부가 재정으로 손실을 메워주겠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정부의 재정 손실은 또 무엇으로 채워넣는다는 것일까. 답은 뻔하지만 정부는 이 마지막 의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가정이든 정부든 살림살이는 결국 수지균형을 맞춰나갈 때 건강성을 유지하게 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한전의 재무 건전성을 뒷받침할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은 없는 상태다.

여름철 전기요금 인하 방침이 아니더라도 한전은 이미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한때 10조원 규모의 흑자를 구가하던 우량기업인 한전은 최근 들어 흑자는커녕 적자폭 확대에 신음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전은 올해 1분기에만 6299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행되는 혹서기 전기요금 할인은 한전의 영업실적을 더욱 악화시키는 악재일 수밖에 없다. 올해 여름철 요금할인을 위해 한전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손실액만 28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한전은 공기업인 동시에 증시에 상장된 주식회사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주주의 이익을 훼손하는 행동을 임의로 할 경우 배임 논란에 휘말릴 수도 있는 곳이다.

한전의 적자는 지난해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17년만 해도 5조원 가까운 영업이익을 냈던 한전은 2018년에 208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시기를 고려하면 누가 보더라도 탈원전 정책이 한전의 영업실적을 크게 악화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대적으로 비싼 액화천연가스(LNG)와 신재생에너지를 발전 원료로 사용하는 비중이 늘어난데 따른 부작용이라 할 수 있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한전의 부채도 크게 늘리고 있다. 올해 3월말 기준으로 한전의 부채는 121조2943억원으로 늘어났다. 올 들어서만 7조 이상이 추가된데 따른 결과다. 대규모 흑자를 내던 시절이라면 별 것 아닐 수 있지만 현재 상황에서 판단하자면 부채 누적은 한전의 재무 건전성을 크게 훼손하며 기업가치를 떨어뜨리는 악재라 할 수 있다.

여름철뿐 아니라 겨울철에도 국민들이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정부가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한전의 재무 건전성을 악화시키고 결국 국민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손실을 메워주는 식의 에너지정책은 안 된다는 얘기다.

전기요금 체계 정비와 관련해 정부는 좀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국민들에게 공짜 혜택을 베푸는 것처럼 사실을 호도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한전의 전력생산 원가 공개 의지를 수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를 토대로 보다 현실적인 전기요금 체계를 구상하는 것이 좋은 방법일 수 있다.

이쯤에서 탈원전 정책도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대선 공약이었다 해도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과감히 되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게 장기적으로는 국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고려 없이 단기적으로 국민들의 입맛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마련된 정책은 그게 무엇이든 포퓰리즘이란 비난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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