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한국을 향해 보복 카드를 빼들었다. 2차 대전 당시 강제징용된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관련기업들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우리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그에 대한 불쾌감을 엉뚱한 방식으로 표출하고 나선 것이다.

일본의 이번 조치는 여러 면에서 옹졸하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자신들이 저지른 역사적 잘못에 대해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항변할 길이 없으니 ‘방귀 뀐 놈이 성내듯’ 애먼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해코지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산업 분야의 핵심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 또한 그들의 야비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일본이 정조준한 곳은 과거사 책임 공방과 무관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업들보다 비교우위의 실력을 쌓아온 한국의 대표적 기업들이다. 일본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그 파급효과가 한국 경제 전반에 미칠 것을 노렸음이 분명해 보인다.

[사진 = 연합뉴스]
성윤모 산업부 장관(가운데). [사진 = 연합뉴스]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발표한 조치의 내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요한 품목의 한국으로의 수출을 깐깐하게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와 달리 해당 제품을 수출할 때마다 매번 허가 과정을 거치도록 하겠다는 얘기다. 이 조치는 오는 4일부터 곧바로 실시된다. 일본은 지금까지 한국을 포함한 27개국에 대해 해당 제품의 수출 허가를 면제해왔다.

대상 품목은 3개로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제조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기판 제작에 필요한 리지스트, 반도체 세정 과정에서 소요되는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이다. 일본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의 경우 세계 생산량의 90%, 에칭가스의 경우엔 그보다 약간 적은 70%를 점유하고 있다.

이들 품목은 국내 대기업이 직접 수입해 사용하거나 몇몇 중소기업이 원료를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생산한 뒤 삼성전자 등으로 납품하고 있다.

일본의 이 조치는 표면적으론 허가 과정을 새로 둠으로써 규제를 강화한다는 내용이지만 실제로 금수조치에 해당한다고 볼 여지도 있다. 언제든 허가를 내주지 않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사실상 수출을 봉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론 규제 강화, 속으론 금수조치가 될 수 있는 이번 조치는 피해 당사자인 한국 기업들을 혼란시키는 성격도 지니고 있다. 이 또한 일본의 노림수인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응을 준비중인 한국 정부나 기업들은 일본의 속내가 단순히 수출 과정을 복잡하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상의 금수 조치를 취하려는 것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뿐이 아니다. 일본이 금수 조치에 나선다고 할 경우 그 구체적 대상이 원료인지 완성된 부품인지도 현재로서는 온전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일본이 90일이 소요되는 허가 기간을 둠으로써 한국 기업을 피곤하게 만들려 한다는 시각과 수출길을 봉쇄하려 한다는 시각이 공존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부는 현지 공관 등을 통해 일본의 정확한 의도를 파악하려 애쓰는 한편 1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주재로 녹실회의를 열고 대응방안을 모색했다. 녹실회의는 박근혜 정부 시절의 ‘(청와대) 서별관 회의’를 계승한 것으로서 정부와 청와대 경제관련 참모들이 참여하는 비공개 회의를 지칭한다.

이날 회의에는 홍 부총리 외에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 관련부처 장관, 이태호 외교부 차관,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성 장관은 같은 날 오후엔 서울 무역보험공사에서 열린 수출상황점검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면서 일본의 보복 조치에 대응할 정부 방안을 공개했다. 이 자리에서 성 장관은 “오전의 관계장관 회의(녹실회의)를 통해 현 상황 및 대응방향을 면밀히 점검했다”고 소개한 뒤 “국제법과 국내법에 의거해 필요한 조치를 취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대응방안엔 세계무역기구(WTO)에 일본을 제소하는 방안도 포함돼 있다. 우리 정부가 일본의 행위를 경제보복 조치로 단정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일본이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지만 우리 대법원의 판결을 이유로 경제보복 조치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고, 이는 민주주의 기본원칙과 상식에 반한다는 것이 성 장관의 설명이었다.

성 장관은 또 “수출 제한은 WTO 협정상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을 뿐 아니라 최근 일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선언문의 정신에도 배치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관련 품목의 수입선 다변화와 국내 생산설비 확충, 국산화 등의 노력을 한층 강화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부품 소재 장비의 경쟁력 강화의 발판으로 삼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는 아직 일본의 금수 조치가 강행될 경우 우리 산업에 미칠 파장이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 정확한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경우 수입대체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도 파악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단기 대응책 마련과 함께 장차 초래될 파장의 크기를 시나리오별로 추산해내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이번 조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통신기기 및 첨단 소재의 대한(對韓) 수출을 통제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미리미리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이번 조치로 보아 한국의 수출에 치명타를 입힐 다른 품목에서도 우대대상국 지위를 없앨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노력과 함께 병행돼야 할 것이 외교적 노력이다. 외교력을 통한 해결은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양측이 윈윈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이번 조치가 해당 품목들의 장기적 금수 조치로 이어지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조심스레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수출 금지 조치를 실행에 옮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란 보다 낙관적인 전망도 동시에 나온다. 수출 금지가 실행될 경우 일본 업체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연쇄적으로 미국 및 유럽 업체들까지 영향권에 들 수 있다는 게 그 같은 전망의 배경이다.

일각에서는 일본 정부가 전면적인 수출 제한 조치를 실행에 옮길 경우 오히려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 호재가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을 내놨다. 이는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이 부품 공급 제한으로 감산 체제에 돌입하면 반도체 등의 공급 과잉 현상이 해소될 수 있으리란 관측과 연결돼 있다.

KTB투자증권 김양재 연구원은 일본의 수출 제한이 현실화되면 한국 제조 기업들의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가격 협상력이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일부 일본 언론은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가 한국 기업들의 ‘탈(脫)일본’을 부추겨 장기적으로는 일본에 손실을 안길 것이란 우려를 제기했다. 경제전문인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일본제 반도체 재료가 안정적으로 조달되지 않는다면 중장기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일본 탈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수출 제한이 삼성전자 등으로 하여금 소재 공급선 다변화를 꾀하도록 자극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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