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맞설 대응 매뉴얼을 갖고는 있는 걸까? 지난 1일 일본 정부 당국이 대한(對韓) 보복 카드를 발표한 이후 이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기대보다는 우리 정부의 대응 능력에 회의를 표하는 시각이 더 많다. 그로 인해 불안감을 표출하는 목소리와 함께 정부의 안일한 태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있다. 특히 양국 간 갈등 상황이 이 지경까지 악화되도록 우리 정부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이번 조치 발표 이후 일본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식들을 보면, 일본 정부는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전혀 대화 의지를 보이지 않은데 대해 불만을 쌓아왔다. 곧 있을 참의원 선거 등 정치적 이유가 보복 동기의 전부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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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근한 예로 보름여 전 일본의 정부 대변인 격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 문제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진작부터 중재위원회 설치를 요청했으나 응답이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스가 장관에 따르면 일본이 한국 정부에 그 같은 요구를 한 때는 지난 5월이었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그간 대법원의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과 관련해 ‘정부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이는 곧 정부 차원에서 조치를 취할 의지가 없음을 진작부터 드러낸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은 아베 신조 총리 등이 보여온 일본 정부의 예사롭지 않은 움직임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한편 한국 정부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으리란 기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발표가 나오고 하루가 지난 2일까지도 정부의 행보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정부가 한 일이라곤 일본 당국의 발표 당일 부랴부랴 녹실회의를 열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고, 일본 대사를 불러 항의하기로 결정한 것이 전부인 듯 보인다.

녹실회의 논의 결과를 알린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보다 구체적 대응 방안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했다.

희망적으로 생각하자면, 정부가 대응 카드를 미리 꺼내보이는 것이 전략상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패를 감춰두고 있다고 여길 수도 있다. 정말 그럴까? 이에 대한 답은 “아니오”일 가능성이 훨씬 더 많다. 그간 보여온 정부의 행태가 그 같은 판단의 배경이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미숙함도 이미 지난달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해 답변할 때 드러났다. 강 장관은 일본 정부가 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보복을 가해올 경우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관계가 껄끄러운 국가일지라도 다른 부처 장관과 달리 유화적 발언으로 관계를 부드럽게 관리해야 할 위치의 외교부 장관 발언으로선 놀랄 만큼 강경한 것이었다.

[그래픽 = 연]합뉴스TV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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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아무런 대응책도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내지르고 본 발언이었음이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일본을 상대로 강경하게 대응하는 것은 늘 국민적 지지를 받게 마련이다. 심지어 한·일관계를 극도로 악화시키는데 일조한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도 방문조차도 그랬다. 박근혜 정부가 무모하게 저질러놓은 ‘위안부 합의’를 현 정부가 일거에 무효화시킨 것도 마찬가지다. 국민들에게 일시적으로 통쾌함을 선사했지만, 한·일관계 악화에 대한 아무런 대응책을 마련해두지 않은 것이 두고두고 후유증을 낳고 있는 것이다. 외교 전략으로 보면 자격 미달 수준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우리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WTO 제소를 두고도 여러 뒷말이 나오고 있다. 이 방식이 별로 유용하지 않다는 것은 상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선 수년에 걸쳐 지루하게 1, 2심 공방이 이어질 게 뻔하다. 보다 본질적 문제를 건드리자면 WTO가 제 역할이나 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같은 ‘스트롱 맨’들이 벌이는 싸움만 보더라도 WTO는 이제 허울만 남은 기구라 할 정도가 돼버렸다. 양자 간 협정(FTA)에 기대지 않고선 국가 간 교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만큼 WTO는 사실상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다.

다행인 점은 일본 내부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정부의 조치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일본이 수평적 교역 관계를 이루고 있고, 전세계가 촘촘히 네트워크화돼 있는 까닭에 일본도, 나아가 미국이나 유럽의 주요국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한 예로 삼성전자에 에칭 가스를 공급하는 일본 회사 ‘스텔라케미화’의 주가는 일본 정부의 보복조치 발표 이후 하루만에 종가 기준으로 2.3%나 하락했다고 한다.

일본 언론들은 또 삼성전자에 소재를 공급하는 일본 회사 외에 삼성으로부터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받는 애플 등 글로벌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경고했다. 결과적으로 일본 정부의 조치가 자충수인 동시에 ‘너죽고 나죽자’식 하책임을 지적하고 나선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변수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요즘이다.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예고된 사건에 대해서라도 정부가 보다 촘촘히 대응책을 마련하고 위기 도래시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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