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수출 규제를 풀기 위한 정부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세계무역기구(WTO) 이사회에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를 긴급현안으로 상정하는가 하면 통상 및 외교 당국자들이 일본은 물론 미국의 카운터파트들과 접촉하며 한·일 무역 갈등을 정치·외교적으로 풀려는 노력도 벌이고 있다. 그간 우리 정부가 제3자인 양 방관하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본발 위기를 방치했던 것에 비하면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사건 초기에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를 단순히 경제문제로 인식하려는 시각을 드러냈다. 일본 측의 징용공 관련 중재위원회 설립 제안을 진작부터 묵살한 일, 경제 보복이 알려진 직후 통상 당국자들이 기업 임원들에게 일본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했는지를 물어보았다는 것 등이 그 배경이다.

정부 간 갈등이 초래한 정치·외교적 성격의 보복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출 규제가 마치 양국 기업 간 갈등의 산물인 양 취급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정부의 이런 태도는 지난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과 30대 기업 총수 등과의 간담회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드러났다. 일본 스스로 안보 관련 이유를 들어 한국에 제재를 가하고 있음을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애꿎은 기업인들을 불러 오히려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으니 하는 말이다. 일부 공개된 발언들이 익명으로 처리되긴 했지만, 정부 간 갈등 탓에 유탄을 맞게 된 기업들로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청와대 간담회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과 기업인들의 청와대 간담회 모습. [사진 = 연합뉴스]

더구나 직접 관련도 없는 기업들까지 자산 규모 순으로 대거 불러들여 간담회를 했으니 보여주기 행사였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부가 그간 대기업을 경제 성장 과정에서의 동반자라기보다 개혁 대상으로 여겨온 측면이 강했다는 점 역시 이번 간담회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이유가 되고 있다.

물론 일본의 수출 규제에 대응하려면 직접적이고 일차적 피해 당자자인 기업들의 입장을 경청해야 한다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요량이었다면 기업인들을 소집하듯 불러모을 것이 아니라 정부 관계자가 한국경영자총협회나 대한상공회의소 등을 찾아가 의견을 구하는 것이 보다 사려 깊은 행동이었을 것이다.

현 정부가 적대시하는 단체이긴 하지만, 이럴 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활용해 일본의 게이단렌(경단련)과 소통하도록 독려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를 통해 개별 기업들이 일본의 감정을 자극하는 일 없이 일본의 주도적 경제단체를 움직여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사태 해결의 주역은 어디까지나 정부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문제는 아베 신조 총리 등 일본 정부 관계자들이 앞장서서 안보와 관련된 이유로 발생했음을 공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이단렌조차도 자국 정부의 한국에 대한 규제를 안보와 관련된 문제로 간주한다고 밝히면서 불개입을 천명하고 있지 않은가.

문 대통령도 청와대 간담회에서 기업인들에게 “일본 정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는 조치를 취했다”고 말했다. 그리곤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국제 공조를 병행하겠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정말로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대응 태도를 확 바꿔야 한다. 서로의 자존심을 살리되 물밑 작업 등을 통해 특사 교환 문제를 논의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러려면 외교부가 주도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게 정답이다. 이미 무능을 드러낸 외교부이지만 이런 판국에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면 존재 이유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 미국 간 갈등과 관련해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한국 미국 간 갈등과 관련해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오른쪽). [사진 =연합뉴스]

여기에 더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또 있다. 청와대 간담회에서 일부 참석자가 거론했듯이 규제를 완화해 우리가 소재 및 부품 산업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비근한 예로 이번에 문제가 된 고순도 불화수소의 경우 우리도 충분한 기술을 지니고 있지만 환경규제에 묶여 공장 설립이 어려운 탓에 수입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한국을 향한 일본의 규제는 앞으로 더욱 심화되고 광범위해질 것이란 우려가 실감나게 제기되고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도쿄무역관 보고에 의하면 일본은 현재 한국을 화이트국가 27개국 리스트에서 아예 제외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보고서엔 이달 24일을 시한으로 정해두고 전자정부종합창구를 통해 의견 수렴을 하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화이트국가 제외 조치는 한국이 더 이상 안보우방국이 아님을 공식화하는 극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개만이 아니라 모든 민감 품목에 대해 일일이 일본 당국의 개별허가를 받아야 물건을 수입할 수 있다. 제품이 정확히 수입국에 들어가는지, 사용목적이 적절한지, 안보상 위험은 없는지, 수입국이 물품을 제대로 관리하는지 등을 하나하나 따져본 뒤 적합 판정이 내려져야만 수출이 허가되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다면 두 나라는 사실상 총성 없는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는 현 사태가 전적으로 정치·외교적 사안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상황에 대한 정부의 냉철한 인식과 그를 바탕으로 한 정확한 처방이 필요한 때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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