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서 누려온 개발도상국(개도국) 지위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몇몇 부자 나라들이 아직도 개도국 지위를 이용해 교역에서 각종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이 계기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은 국제 사회에서 개도국 재편 논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WTO는 다자간 무역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협정이 아닌 상시기구가 필요하다는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1995년 탄생했다. 이후 덩치를 키워온 결과 현재 164개 국가를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다.

회원국들에게는 차별적 대우가 부여되고 있다. 이를 위해 WTO는 회원국을 크게 선진국(Developed Country)과 개도국(Developing Country) 두 부류로 나눈다. 개도국은 다시 개도국과 최소 개발국(Least Developed Country)으로 세분된다.

[사진 =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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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는 29일 현재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국 중 3분의 2 정도가 개도국 지위를 누리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선진국과 개도국을 분류하는 어떠한 기준도 마련돼 있지 않으며, 회원국 각자가 스스로의 지위를 ‘선언’하도록 하고 있다고 부연하고 있다. 특정 국가가 스스로 개도국이라 선언하면 개도국으로 분류된다는 뜻이다.

다만, WTO는 개도국이 특정한 조항을 활용해 이익을 얻으려 할 경우 다른 회원국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처럼 WTO는 개도국에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기구 활동 초기에 보다 많은 국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개도국에 유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WTO 출범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신흥 개도국들이 약진을 거듭한 결과 이들 중 일부는 비교적 부자 나라가 됐다. 한국이나 멕시코, 싱가포르, 홍콩, 브루나이,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등이 그 그룹을 대표한다. 중국은 아직 개인 소득은 높지 않지만 미국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G2(주요 2개국)로서 실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이번에 미국이 개도국 재편 논란에 불을 지핀 이유도 중국의 국제적 위상 강화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직접적 이유로는 한창 달아오른 미·중 무역전쟁 과정상의 대(對) 중국 압박 강화가 꼽히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만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아니다. 한국 역시 사정권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26일(현지 시간) 개발된 나라들이 개도국 대우를 받는 현실을 바로잡으라고 미 무역대표부(USTR)에 지시하면서 WTO를 향해서는 90일 이내에 실질적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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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제시한 개도국 지위 박탈 대상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G20 국가 △1인당 국민총소득 1만2056달러 이상의 국가 △세계 무역량에서 차지하는 비중 0.5% 이상인 나라 등 네 가지다. 이중 하나의 조건이라도 충족하면 개도국 대접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한국은 이상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한다.

한국은 전에도 개도국 자격 시비에 말린 적이 있다. 1996년 12월 OECD에 가입한 것이 그 빌미가 됐다. 하지만 농업 외의 분야에서는 개도국에게 주어지는 특혜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약속 하에 지위 유지를 보장받았다.

그 덕분에 한국은 지금까지 쌀 등 농산물에 대해 높은 관세 장벽을 쌓으면서 내부적으로는 농가를 상대로 보조금 등을 선진국들보다 높은 수준에서 지급할 수 있었다. 쌀의 경우 현재 미국과 합의된 관세율은 513%다. 이밖에도 한국은 개도국이라는 이유로 관세 감축에 의해 수입이 급증할 땐 특별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가 있다 해서 당장 우리 농업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새로운 농업협정이 타결되려면 시일이 꽤 걸린다는 점, 미국의 주 타깃이 중국이라는 점 등이 그 같은 판단의 기반인 듯 보인다. 농업 외 부문에서는 이미 선진국 대우를 받고 있는 만큼 한국이 입을 타격이 제한적일 것이란 분석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와 함께 식량은 국민의 생존권과 직결되는 자원이어서 결코 가볍게 다룰 대상이 아니다. 특히 식량 자급은 국가안보 차원의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 지 오래다. 그 결과 많은 나라들이 식량안보를 중요한 정책목표로 삼고 있다.

미국의 의지가 얼마나 빨리 관철될 지는 미지수다. 당장 중국부터가 자국민들의 개인 소득 수준이 미국의 6분의 1 수준도 못 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는 집단적인 WTO의 내부 반발로 이어질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미국이 새로운 무역체제를 만들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기존의 국제무역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것이란 우려가 그 같은 전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석 달 안에 WTO가 가시적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미국 단독으로라도 위의 네 가지 조건 중 하나 이상을 충족하는 국가에 대해 개도국 대우를 철회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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