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 이행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을 밝혔다. 한국으로 수출할 폼목 중 어떤 것을 개별허가 대상으로 새로 지정할 지를 담은 수출 규제 시행세칙을 7일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당초 예상과 달리 시행 세칙에는 새로운 품목이 추가되지 않았다. 일본은 지난 달 4일 고순도 불화수도 등 3대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를 개별허가 대상으로 전환한 바 있다.

이날 일본이 공개한 시행세칙(포괄허가취급요령)은 이달 초 각의를 통해 의결한 수출관리령의 하위법령으로서 1100여개 전략물자 가운데 어느 것을 개별허가 대상으로 삼을지를 결정한 내용을 담을 것으로 예상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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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 [그래픽 = 연합뉴스]

우리 정부는 시행세칙에 담긴 개별허가 품목들을 확인해 해당 품목을 수입하는 우리 기업들을 추려낸 뒤 예상되는 피해액을 산출하고 대응책도 마련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공개된 시행세칙엔 기존의 불화수소 등 세 개 품목 외에 더 이상 개별허가 대상이 추가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본이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한국무역협회 문병기 수석연구원은 “국제 사회의 여론을 감안해 조심스레 접근한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일본이 한국의 대응 상황을 지켜보면서 계획을 수립하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도 일본은 한국이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해 과잉 반응을 보인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일본의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는 지난 5일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개별허가로 바뀌더라도 구체적으로 군사전용 등의 우려가 있는 경우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꼼꼼한 허가 절차가 요구된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은 그 같은 허가가 필요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사태를 과장하고 있다는 주장도 곁들였다.

기존의 반도체 소재 등에 대한 개별허가 전환에 대해서도 금수 조치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기존 입장을 그대로 반복해 강조했다. 문제가 없으면 수출은 즉시 이뤄질 것이고, 그런 만큼 국제 공급망을 연쇄적으로 훼손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일본 측의 주장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당장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소재들에 대한 수출허가가 ‘즉시’는 고사하고 조치 이후 한 달이 넘도록 한 건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시행세칙 발표 이후에도 일본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유지했다. 한 당국자는 “일본이 확전을 자제한 것으로 판단하긴 어렵다”고 평가한 뒤 “어떤 추가 조치를 할지 지켜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쨌든 개별허가 품목이 늘어나지 않음에 따라 당분간은 수출 규제 여파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업체 외의 업체로 번지지 않게 됐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 역시 일본 정부의 마음먹기 나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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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일본이 추가 조치를 취할 때 기존의 세 개 부품 외의 품목 중 일부를 특별포괄허가 대상으로 전환할지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 특별포괄허가는 일반포괄허가보다는 덜 우호적이지만 개별허가를 면제한다는 점에서 차선책으로 기대해볼 만한 제도다.

특별포괄허가는 전략물자 가운데 민감성이 떨어지는 857개 품목에 대해 적용하는 제도다. 해당 물품을 수출하는 일본 기업이 수출관리를 잘 하고 있음을 입증한 뒤 자율준수 프로그램(CP) 인증을 받으면 이 제도의 적용 대상이 된다. CP 인증을 받은 기업은 개별 허가 없이 3년 단위로 포괄허가만 받으면 된다. CP 인증을 받으면 백색국가에게 적용되던 최혜국 대우가 그대로 부여된다는 뜻이다.

일본은 그간 백색국가 리스트에 오르지 못한 대만이나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국들에 물건을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에게 이 제도를 적용해왔다. 일본은 최근까지는 한국을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백색국가 명단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이 백색국가에서 제외된 이상 추가 제재가 이뤄질 경우 우리 기업으로서는 CP 인증을 받은 일본 기업으로부터 물건을 수입해야만 개별허가를 면할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는 우리 중소기업들의 경우 그 같은 혜택을 누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의 교역 상대인 일본의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들처럼 수출관리를 철저히 함으로써 CP 인증을 받는다는 게 그리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은 이날 관보를 통해 한국을 백색국가 목록에서 제외시키는 내용의 수출관리령 개정안을 예정대로 공포했다. 이와 함께 교역 상대국 분류 체계도 변화시켰다. 기존의 백색국가 리스트를 없애고 교역 상대국을 A, B, C, D 네 개 그룹으로 나눈 것이다. 백색국가에 있던 한국 외 26개국은 A그룹에, 한국은 그 다음 단계인 B그룹에 포함됐다. A그룹은 이전의 백색국가들이 누리던 것처럼 포괄허가 혜택을 받지만, B그룹은 일반포괄허가가 아닌 특별포괄허가 혜택만을 누릴 수 있다. 결국 한국은 이전에 비해 줄어든 품목에 대해서만 포괄허가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전에 없던 절차까지 거쳐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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