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0시를 기해 일본의 수출관리령 개정안이 발효됐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본격화된 셈이다. 이날부터 한국은 일본의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기존 27개국 중 한국을 제외한 국가들만 A그룹으로 새롭게 분류돼 수출 관리 제도상 포괄허가대상으로 남게 된 것이다. 한국은 나홀로 B그룹에 자리했다.

이번 조치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물품을 수입할 때 일일이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포괄허가 유효기간이 3년인데 반해 개별허가의 경우 6개월마다 허가를 갱신해야 한다. 수입하려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물건을 수입할 때마다 일본 경제산업성(경산성)의 심사를 거쳐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이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압박 강도를 마음껏 조절할 법적·제도적 기반을 완비했다. 보복 조치가 본 궤도에 돌입하면서 우리 기업들의 입장은 더욱 답답해졌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업체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소재나 장비를 수입해야 하는 모든 기업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대응도 마땅한 게 있을 리 없다. 전략물자관리원이 홈페이지를 통해 경산성에 의해 수출관리 자율준수(CP) 대상으로 인증된 일본 기업을 소개하고 이들 기업을 통한 수입을 장려하는 것 정도가 고작이다. 정부 차원에서 소재 산업 육성에 발벗고 나선다지만 이는 장기전략인 만큼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 기업들에겐 당장은 와닿지 않는 조치다.

가장 답답한 점은 일본의 규제 조치가 어느 선까지 나갈 것인지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일각에선 한국과 일본이 강대 강 대결을 이어가다 보면 싸움이 교역 외 분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일본 내 한국기업의 세무 및 노무 관리 강화, 관세 장벽 높이기 등이 가능한 제재 방안으로 거론된다. 나아가 비자발급 기준 강화 등 영사 제재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는 마당이다.

이는 한국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결정함으로써 갈등 영역을 경제 이슈에서 안보 이슈로 넓힌 것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보복이 보복을 낳으면서 싸움 영역이 더 넓어질 것이란 우려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란 의미다.

이번 조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지시를 받은 경산성이 선도하고 있다. 그런 만큼 당분간 일본 외무성이 개입할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우리가 그간 시도한 외교적 노력이 잘 먹히지 않은 것도 이런 정황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사진 = 연합뉴스]
일본 총리관저 앞에서 대한(對韓) 수출규제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일본 시민들. [사진 = 연합뉴스]

일본의 행태는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면서 국무부를 배제한 채 무역대표부(USTR)와 상무부를 전면에 내세운 방식을 연상케 한다. 미·중은 현재 교역 당국 간 고위급 협상을 이어가면서 외교적 해결은 간간이 펼쳐지는 정상들 간 대화를 통해 시도하려는 패턴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또한 이 같은 방식을 원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외교적 접촉 루트를 차단하려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해결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외교부 차원에서 직접 문제를 풀려고 하기보다는 실무선에서의 꾸준한 접촉을 통해 한·일 정상이 톱다운 방식으로 문제를 풀도록 유도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해법이 될 수 있겠다는 것이다.

마침 일본 언론에서도 두 나라 정상이 이 문제를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제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산케이 같은 극우 보수 성향의 신문이 반한 논조를 이어가는 가운데 아사히 신문은 28일자 기사를 통해 ‘장기적 관점에서의 국익’을 강조하며 “한·일 정상이 회담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은 이와 함께 한국의 ‘일본 이탈’ 시도로 관광과 소비 분야에서 일본에 역풍이 불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아사히는 또 일본 수출기업들도 수출 규제로 빚어진 피해를 줄이기 위해 다각적인 자구노력을 펼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일본의 한 레지스트 제조사가 인천에 있는 공장의 시설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었다.

마이니치신문도 이날 비슷한 내용의 기사를 내보냈다. 이 신문 또한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脫)일본화’ 움직임을 소개하면서 우려를 표했다.

이에 앞서서는 산케이와 함께 일본 우익의 입장을 대변해온 요미우리조차 출구 전략이 없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를 지지할 수 없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일본 안에서 일고 있는 이 같은 주화론은 한국 정부의 외교 노력이 헛된 힘의 낭비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오히려 한국의 선도적 외교 노력이 양국 국민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예고하는 징후로 분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 면에서 지소미아 종료를 일본의 태도에 따라서는 재검토할 수도 있다는 이낙연 총리의 발언은 시의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지일파로 분류되는 이 총리를 필두로 군불때기를 한 뒤 종국엔 양국 정상이 외교적 해결에 나선다면 지금의 한·일 갈등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기 이전에 해소될 수도 있다. 이는 한·미 간 동맹을 실효적으로 강화하는 전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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