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D의 공포’가 논쟁적 이슈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늘 그래왔듯이 정부는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다. 다수가 ‘D의 공포’를 거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 나오는 주제이다 보니 마냥 허투루 흘려버릴 일도 아닌 듯싶다.

얼마 전까지 ‘R의 공포’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R의 공포’가 ‘D의 공포’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그럴듯하게 제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묵은 주제어들인 ‘R의 공포’, ‘D의 공포’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이를 논하기 전에 우선 두 주제어의 개념부터 정리해 보기로 하자.

김용범 기재부 1차관. [사진 = 연합뉴스]
거시정책협의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 [사진 = 연합뉴스]

‘R의 공포’는 경기 침체를 의미하는 ‘Recession’의 이니셜을 따와 만들어낸 말이다. ‘경기침체에 대한 공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이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한 계기는 미국에서 나타난 장단기 국채금리의 역전이었다. 보통은 장기 국채의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기 마련인데 이례적으로 단기 국채를 대표하는 2년물 금리가 10년물 국채 금리를 앞서가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었다.

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국채금리 역전 현상은 세계적 경기 침체를 불러오곤 했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번 국채금리 역전도 글로벌 리세션의 전조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하나 둘 나타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이어지고 있지만 이번 경우는 이전과 양상이 다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R의 공포’와 달리 이번에 새롭게 불거진 ‘D의 공포’는 진원지와 무대가 모두 국내로 제한돼 있다. 우리나라에 ‘디플레이션(Deflation)’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요지다. ‘D의 공포’는 ‘디플레이션이 나타날 것에 대한 공포’를 의미한다.

디플레이션은 물가가 장기간 낮은 상태를 이어가면서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지칭한다. 실제로 디플레가 도래하면 경제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들게 된다. 물가 하락→기업들의 매출 감소→생산 및 투자 감소→고용 감소→소비 감소→경기 침체→저물가 심화 등의 악순환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다는 의미다. ‘D의 공포’란 말도 그래서 생겨났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연상하면 ‘공포’라는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후관계를 따지자면 경기 침체 이후 디플레이션이 오는 게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경기 침체기에 인플레이션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건 이례적인 경우다.

이번에 갑자기 ‘D의 공포’가 재론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근원은 통계청이 3일 발표한 ‘8월 소비자물가 동향’ 내용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작년 동월 대비 0.0%의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1965년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낮은 상승률 수치다. 종전 최저치는 1999년 2월 기록인 0.2%였다. 수치를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8월 물가 상승률을 소수점 세자릿수까지 따져보면 지난해 같은 달보다 0.038% 하락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이다. 실제로는 1년 전보다 물가가 더 싸졌다는 뜻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이번 발표 수치는 국내 소비자물가가 한동안 낮은 상승률 흐름을 보여오던 중 나타난 것이어서 디플레이션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자극할 만했다. 실제로 물가 상승률 0%는 한국은행이 물가안정 목표치로 제시한 2%와 큰 괴리를 보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국내에서 또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D의 공포’는 실체가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정부는 ‘아니오’라는 입장을 밝혔다.

통계청 발표가 나온 이날 기획재정부의 김용범 1차관은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거시정책협의회에서 최근의 저물가 현상에 대해 “수요 측보다는 공급 측 요인에 상당 부분 기인한 것”이라며 “디플레이션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김 차관은 지금과 같은 저물가 상태가 장기화할 경우 우리나라의 경제활력이 더 약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현 상황이 디플레 상태는 아니지만 그런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음을 시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발언은 성급하거나 지나친 불안을 경계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김 차관은 현재의 저물가 상황이 도래한 배경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그가 꼽은 주요 이유들은 △농산물과 국제유가 하락 △유류세 인하와 건강보험 적용범위 확대, 무상급식 등 정책적 요인 등이었다.

그는 또 “(변동성이 큰 농산물 등을 제외하고 집계한) 근원물가는 1% 내외의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디플레이션 상황에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윤면식 한국은행 부총재 역시 “내년 이후엔 물가 상승률이 1%대로 올라갈 것”이라며 “현 상황이 디플레를 우려할 정도는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의 저물가 흐름을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에 나타난 공통 현상으로 진단하면서 “경기순환 요인 외에 글로벌화, 기술진보 등 구조적 요인이 (저물가 현상 초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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