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경제 뉴스의 대종을 이루는 것이 디플레이션(Deflation) 논란이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라는 의미의 ‘D 공포’ 또는 ‘D의 공포’라는 말도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많은 매체들이 이 용어를 써가며 현재 우리사회가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들었거나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민간 경제연구소나 경제학자들 일부도 비슷한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대로 가다간 우리도 일본처럼 ‘잃어버린 20년’을 경험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내놓는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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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 제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한동안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초입에 돌입해 있을지 모른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제기됐다. 지금 되돌아보면 다소 지나쳤다고 평가할 수 있지만, 경제에 대한 분석은 지표를 토대로 하는 것인 만큼 터무니없는 주장만은 아니었다.

지금의 경제 상황은 이전 정부 때보다 악화돼 있는 게 사실이다. 성장률과 물가 등 대표적 거시지표들이 그 같은 사실을 입증해준다. 전반적으로 경제 활력이 더 떨어졌고, 당장 물가가 8개월 연속 0%대의 성장률을 보이며 마이너스 수준까지 떨어졌으니 ‘D의 공포’가 거론되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 보인다.

통계청이 최근 밝힌 올해 8월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같은 달보다 0.038% 하락했다. 공식적으로는 소수점 한자리까지만 집계하는 관계로 0.0%로 기록되지만 실제로는 물가가 1년 전보다 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소비자물가가 전년 동기보다 더 내려간 것은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현상을 두고 경제학자나 언론들이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그 위험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물가가 싸지면 실질적으로 구매력이 증강되니 좋은 일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소비자들 입장에서는 물가가 떨어지면 당장은 좋을 수 있다. 구매력이 더 강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장기화될 때 총체적 어려움이 발생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섭다고 입모아 말한다.

그 이치는 이렇다. 물가가 장기간에 걸쳐 떨어지면 소비가 줄어들고 이는 기업들의 생산과 투자 감소로 이어진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은 고용 감소다. 고용 감소는 사회 전반의 소비를 위축시키고 이는 다시 생산과 투자 감소로 연결된다.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로써 경제 활력이 떨어지고 더딘 성장을 보이거나 퇴보하게 된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대표적 사례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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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물가 하락세 장기화가 소비를 줄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동차를 예로 들면 설명이 쉬워질 것 같다. A라는 사람이 자동차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았다고 치다. 막상 돈이 다 모여 차를 사려고 하니 ‘조금만 더’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다달이, 그리고 매년 자동차 값이 떨어지니 물건을 구매하기가 망설여지는 것이다. 자연히 자동차 회사엔 재고가 쌓이게 돼 생산을 줄이고, 투자도 축소하게 된다.

어려움은 다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 월급이 줄어들고 보유하고 있는 아파트 등 자산가치도 줄줄이 하락하게 된다.

차를 많이 파는 자동차 회사도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는 마찬가지다. 자동차 부품값이 나날이 내려가니 완성차를 판매하는 시점엔 부품값도 못 건지는 장사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자동차를 많이 팔수록 손해가 커지는 현상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D의 공포’는 이런 이치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

늘 그랬듯이 정부는 이번에도 불끄기에 나섰다. 아직 디플레이션 상황을 논하기엔 이르다는 것이다. 물가가 0%대 상승률을 이어가다가 마이너스를 보이기까지 했지만 일시적 현상이라는 것이 정부나 한국은행의 공통된 입장이다. 얼마 전 통계청은 현 상황을 ‘디스인플레이션’이란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다만 미약한 정도의 인플레이션 상황이 지속되고 있을 뿐이라는 의미로 내세운 표현인 듯했다.

정부의 입장에도 일리는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하는 디플레이션 판단 기준은 2년 동안의 경기침체와 물가하락 지속이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물가가 잠시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을 두고 디플레이션을 논하는 것은 성급하다 할 수 있다.

8월 소비자물가의 마이너스 증가 현상에 대해 정부는 일반적 케이스와 다르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수요 측 요인이 아니라 공급 측 요인에 의해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이너스 물가가 수요가 줄어듦으로써 나타난 게 아니라 공급가격의 정책적 조절에 의해 나타났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유류세 인하로 기름값을 떨어뜨렸고, 공공서비스 요금 인상 등을 정부가 적극적으로 억제한 결과 소비자물가가 내려갔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기후 요인 등으로 변동성이 큰 농산물 등을 제외하고 매긴 근원물가만 놓고 보면 상승률이 1% 안팎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도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하지만 논란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현대경제연구원은 현 상황을 ‘준(準)디플레이션’으로 판단한다는 분석 결과를 제시했다. 민간과 정부 양측의 주장을 종합하면 현재 우리 경제는 디플레이션 상황은 아닐지라도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위험 지점에 도달하기 전 우리 경제가 활력을 되찾는다면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의미다.

결국 디플레이션 논란은 경제 활력 회복을 위한 담론으로 연결되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렵다지만 우리가 유별나게 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디플레 논란에 휘말리기까지 하는 상황이고 보면 정책적 오류 여부를 심각히 따져보는 것이 우선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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