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에 대한 최근의 우려들이 근거 없는 것만은 아님을 짐작하게 하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 보고서가 나왔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논란중인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할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볼 수도 있다.

KDI는 지난 8일 발간한 경제동향 9월호를 통해 우리 경제가 반 년째 부진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KDI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3월까지 ‘둔화’란 표현을 쓰다가 그 다음부터는 줄곧 ‘부진’이란 진단을 내놓았다. 그러더니 이 달 들어서는 ‘경제 부진’이란 새로운 표현을 제시했다. 정확한 표현은 “최근 우리 경제는 대내외 수요가 위축되며 전반적으로 부진한 모습”(통권 요약)이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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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DI 관계자는 ‘경기 부진’을 ‘경제 부진’으로 바꿔 표현한데 대해서는 특별한 의미 차가 없다고 밝혔다. 중요한 것은 지난해 말부터 우리 경제가 ‘둔화’ 상태를 이어오다가 지난 반년 동안은 ‘부진’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는 사실이다.

이것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 경제는 적어도 지난해 말부터 현저히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해석하자면 1년 여 전부터 수개월 동안 성장률이 점차 떨어지다가 최근 반년 동안은 횡보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는 얘기다.

KDI 보고서는 소비와 투자, 수출이 모두 부진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생산 부문에서도 부진이 이어질 가능성을 거론했다.

다만 최근 들어 마이너스까지 기록한 월별 소비자물가 동향에 대해서는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을 제시했다. 그 근거로 근원물가(농산물 등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하고 산정한 물가)의 상승률이 0%대 후반을 형성하고 있음을 들었다. 일시적 요인이 소멸되는 연말 이후엔 물가가 반등할 것이라는 의견도 덧붙였다.

물가와 관련된 KDI의 진단은 요즘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디플레이션 논란 또는 ‘D의 공포’가 조만간 현실화될 위험성을 부정했다고 볼 수 있다. 디플레는 물가가 장기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가능성마저 완전히 배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현재의 경제 상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통권 요약’을 통해 ‘대내외 수요위축’을 지적한 점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이는 현재의 저물가 현상이 공급 측면이 아닌 수요 측면에 주로 기인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표현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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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정부는 전년 동월 대비 8월 소비자 물가가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이를 공급 측 요인에 의한 현상으로 풀이한 바 있다. 이번 KDI 진단은 정부의 그 같은 진단과 배치되는 것이다.

즉, 지금의 저물가 현상이 공급 과잉이 아니라 수요 부진에 의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KDI의 진단이다. 또 수요위축이 ‘대내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수출과 내수가 모두 부진한 상태에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외적 수요 위축은 한국산 제품에 대한 외국의 수요가 줄어들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수출 부진으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소비 부진과 관련, KDI는 지난 7월 소매판매액이 1년 전 같은 달보다 0.3% 줄었다고 밝혔다. 또 8월 소비자심리지수는 전달보다 3.4포인트 감소한 92.5를 나타냈다. 소비재 수입 증가율 또한 전달의 13.5%에 크게 못 미치는 2.9%에 그쳤다.

설비투자도 반도체를 중심으로 부진을 이어가고 있다. 7월 설비투자의 경우 1년 전에 비해 4.7% 축소됐다. 설비투자의 선행지표인 자본재 수입 역시 8월 들어 8.8%(전년 동월 대비)나 줄어들었다.

건설투자는 주거 부문의 위축 등으로 더욱 심각한 부진 양상을 띠고 있다. 7월 건설기성(이미 시공에 들어간 건설 실적)은 전년 같은 달 대비 6.2% 줄었고, 건설수주는 그보다 더 큰 23.3%의 감소폭을 보였다.

이미 널리 알려진 수출 실적은 다시 세세하게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수출은 지난 7월로 이미 8개월째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일 현대경제연구원은 올해 우리의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기존보다 0.4%포인트 낮춘 2.1%로 새로 제시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앞서 우리 경제가 현재 ‘준(準)디플레이션’ 상태에 있다는 진단을 내놓은 바 있다. 정부의 진단과 달리 우리 경제 현실을 어둡게 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일들이다. 이 연구원은 정부가 디플레 차단을 위해 적극적 재정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KDI 보고서는 정부보다는 민간 경제연구소들의 진단에 상당 부분 공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KDI가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비교적 보수적 스탠스를 취해왔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우리 경제의 현실은 비상한 대책이 필요할 정도로 엄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환골탈태하려는 자세로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 그 방향은 규제와 압박이 아니라 철저히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설정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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