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정부에 감세 정책을 권고하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는 재정 지출 확대에 방점을 찍은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과 사실상 배치되는 것이어서 눈길을 끌만했다.

정부는 513조5000억원(총지출)에 이르는 초슈퍼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함으로써 앞으로도 국민들의 세금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세수 추계상 수지가 맞지 않는 예산안을 편성한 것은 대규모 적자국채 발행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내년도 예산안 편성과 관련해 정부가 상정한 적자국채 발행 규모는 60조원을 웃돈다. 이 모두가 결국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갚아야 할 돈이다. 이는 곧 지금과 같은 세수 확대 기조가 한동안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당분간 감세는 언감생심이란 의미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한경연이 감세 정책을 권고한 논리적 근거 자료는 감세승수였다. 4일 발표한 ‘감세승수 추정과 정책적 시사점’이란 보고서에서 한경연은 나름대로 추산한 이 개념을 제시하며 감세 정책이 지금의 재정확장 정책보다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끌어올리는데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승수(乘數)’란 본디 투자가 달라지는데 따라 나타나는 총소득의 변화를 비율로 나타낸 개념이다. 여기에 ‘감세’란 말을 붙여 만든 ‘감세승수’는 정부가 세금을 줄여줄 때 GDP가 얼마나 늘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지수를 말한다.

한경연은 2013년 1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의 기간을 설정한 뒤 계절조정 자료를 기초로 삼아 재화와 용역을 사들이는데 들어간 정부지출과 국세수입, GDP 등을 변수로 삼아 감세승수를 산출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나온 감세승수는 연평균 1.02였다. 즉, 정부가 세금을 100원 줄여주면 평균 102원의 GDP 상승 효과가 나타난다는 의미다. 반면 한경연이 산출한 정부지출승수는 연평균 0.58이었다. 정부가 재화와 용역을 사들이기 위해 100원을 지출했을 때 나타나는 평균 GDP 상승 효과는 58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한경연은 이를 토대로 정부지출에 치중하기보다 감세 정책을 펴는 것이 GDP를 끌어올리는데 유용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감세는 경제주체들의 경제활동 참여를 자극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감세가 실현되면 기업은 가용재원이 늘어나 투자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고, 가계는 가처분소득이 늘어 소비를 늘릴 수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개인 차원에서는 실업자와 비경제활동 인구의 취업 유인이 강해질 수 있다는 주장도 덧붙여졌다.

한경연은 또 정부가 만약 정부지출을 늘릴 목적으로 지금보다 세수를 늘린다면 그에 따른 GDP 감소 효과가 정부지출에 의한 GDP 상승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증세를 전제로 정부지출을 늘리는 것은 오히려 GDP 상승에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의미다.

재정 확대 일변도의 경제정책은 세수 확대를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결과적으로 기업의 투자여력과 가계의 소비능력을 동시에 떨어뜨릴 수 있다. 요즘 기업 투자와 가계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물가가 정체되고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져가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감세에 대한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다우지수.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뉴욕 증권거래소의 한 직원이 모니터를 통해 다우지수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최근 들어 한국은 미국 등이 감세정책을 펼치는 것과 달리 증세정책을 펼쳐온 게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법인세와 근로소득세의 최고세율이 대폭 인상된 것이 대표적 예다. 인상폭도 매우 큰 편이어서 2016~2018년을 기준으로 할 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에 해당했다.

이 기간 중 36개 OECD 회원국 중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세율을 올린 나라는 각각 7개국에 불과했다. 나머지 국가들은 법인세나 소득세 최고 세율을 내리거나 동결했다. 이중 법인세와 소득세 최고세율을 내린 나라는 각각 10개국, 11개국이었다.

세율 인하에 적극적인 나라중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은 지난해 말 세제개혁을 통해 기업과 가계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여주었다. 특히 법인세 최고세율은 38.9%에서 13%포인트나 낮춰 25.9%로 재조정했다.

이 점이 주효한 덕분인지 미국 경제는 글로벌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독보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최근 미국 증시의 주요지수들은 연일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한 공치사에 여념이 없다. 이런 추세라면 경제 살리기 성공을 앞세워 1년 뒤 대선에서 다시 승리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외 여건 악화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기가 나홀로 호황을 이어가는 중요한 기반은 탄탄한 내수라는 것이 대체적 분석이다.

미국이 높은 경제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는 점은 트럼프 대통령을 한껏 고무시키고 있다. 요즘엔 상승세가 꺾이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지만 최근 발표된 3분기 GDP 증가율(속보치)은 연율 1.9%였다. 앞선 1, 2분기 연율 성장률은 각각 3.1%와 2.0%였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꽤나 부러운 수치다. 미국이 경제 규모 면에서 우리의 10배가 훨씬 넘는 나라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가 처한 상황은 더욱 참담하게 느껴진다.

상황의 심각성은 여당의 움직임에서도 나타난다.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성장률이 2%에는 도달해야 내년 총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 올해가 가기 전 정부가 예산 집행에 바짝 신경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용예산 없이 예산을 모두 집행해 성장률을 0.1%포인트라도 끌어올려야 한다는 절박함이 그 배경에 자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사실상의 증세 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기업이든 가계든 경기 부양과 성장률 상승에 긍정적 역할을 하기 어려워 보인다. 쓸 돈이 있지 않고서야 아무리 투자와 소비를 독려해도 별무소용이다. 이 정도면 재정 투입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퍼주기식 재정 지출을 줄여서라도 감세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번쯤 시도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