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사라진 듯했던 ‘소득주도성장’이란 말이 대통령과 경제사령탑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다. ‘경제 교과서에도 없는 정책’, ‘모험적 실험 정책’ 등이란 부정적 평을 듣다가 장담했던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슬그머니 사라진지 반년여만의 일이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이던 장하성씨가 주도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현 정부의 핵심적 경제정책으로 분류된다.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를 더해 3축 정책이라는 게 현 정부의 주장이지만 ‘혁신’과 ‘공정’은 사실 경제정책이랄 것도 없는,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개념에 불과하다. 사실상 소득주도성장이 J노믹스의 주축이라 할 수 있다.

두 개념을 굳이 경제정책으로 인정한다면 ‘혁신’은 소수 엘리트가 이끌 수밖에 없는 정책 개념이고, ‘공정’은 게임의 룰을 보다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해석할 수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문제는 그나마 정책으로서의 구색을 갖춘 것으로 이해할 만한 소득주도성장이 정책 효과를 내기는커녕 부작용만 일으켰다는데 있다. 장하성 전 실장은 정책 시행 초기에 각종 비판이 제기되자 조만간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 주장했지만 끝내 효과를 내지 못한 채 지난해 11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당시 사실상 경질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만큼 그의 정책실장 수행은 성공적이라 할 수 없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전도사 격이었던 그가 물러난 이후 해당 정책을 거론하는 일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올해 들어서는 문재인 대통령조차 이 단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최근 반년여 동안은 아예 금기시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겼다. ‘소득주도’의 ‘소’자도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내년도 예산안과 관련해 지난달 국회에서 행한 대통령 시정연설에서도 이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다만, “1분위 계층의 소득이 증가세로 전환됐다”는 말로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효과를 은연중 강조하려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그런데 실종됐던 이 단어가 21일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 되살아났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 브리핑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이날 통계청의 3분기 가계동향조사 소득부문 자료가 공개되자 기다렸다는 듯 소득주도성장을 거론했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성과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고 강조했다는 것이다. “소득과 분배에서 조금 더 확실히 좋아지는 모습”이란 말도 했다고 한다.

누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같은 날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소득주도성장이란 말을 모처럼 입 밖에 냈다. 통계청 자료 발표 직후 홍 부총리는 페이스북을 통해 비슷한 내용을 적었다. 그는 포용성장과 함께 소득주도성장이란 말을 언급하면서 일관성 있게 추진해온 정책 효과가 3분기 들어 본격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득분배 지표도 뚜렷한 개선세를 보여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발언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더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통계청 자료의 세부 내용을 살펴본 이들이라면 두 사람의 반응이 뜬금없다고 느끼기 십상이다. 나아가 정책적 오류를 덮기 위해 고의로 통계자료를 왜곡하려 한다는 의심까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날 문 대통령과 홍 부총리의 발언이 나온 구체적 배경은 통계청 자료중 소득 5분위 배율이었던 것 같다. 발표 자료엔 올해 3분기의 소득 5분위 배율이 지난해 동기에 비해 0.15배포인트 줄어든 것으로 나와 있다. 자료에 따르면 올해 3분기의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5분위 배율은 5.37배였다. 이는 가구원수를 고려해 산정한 결과 5분위(소득 상위 20%) 가구의 평균소득이 1분위(하위 20%) 가구 평균소득의 5.37배였음을 의미한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두 사람은 그 배수가 0.15배포인트 줄어들었으니 그만큼 소득 양극화가 해소됐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3분기 기준으로 개선된 통계 수치가 나온 것이 4년만에 처음이라는 점도 이들을 고무시켰던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 정도 자료를 가지고 만신창이가 된 소득주도성장론을 입에 올리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개선됐다는 소득 5분위 배율 자체도 실적으로 내세우기 낯뜨거울 정도인데다 그 속에 담긴 세부 내용은 오히려 한심하기 때문이다.

당장 1분위 가구의 소득이 개선됐다는 통계 해석부터가 분식에 가깝다는 혹평을 듣고 있다. 이번 자료에 나타난 바, 1분위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137만4400원이었다. 이 중 근로소득은 44만7700원에 불과했다. 땀흘리며 일해서 번 돈이 전체 소득의 33%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눈에 띄는 소득 항목은 정부 지원이나 친인척 지원 등을 포함하는 이전소득이다. 1분위 가구의 이전소득은 67만3700원으로 집계됐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답을 말하자면 현재 우리나라 저소득 가구는 일반적으로 정부의 현금지원에 의존해 생계를 근근이 꾸려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1분위 가구의 근로소득이 7분기째 감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와 반대로 이전소득은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우리의 재정 건전성은 급격히 나빠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일자리 등으로 저소득층의 자립기반을 마련해주지 못한 채 현금 지원으로 당장의 생계를 지원하는 것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지금 1분위 가구에 필요한 것은 자립기반 지원이다. 저소득층에서의 임금 근로자 비율을 높이는 것이 그중에서도 으뜸가는 방책이라 할 수 있다. ‘퍼주는 복지’가 아니라 ‘자립을 돕는 복지’ 또는 ‘일하는 복지’ 쪽으로 정책 방향을 선회해야 한다는 얘기다.

‘일하는 복지’의 첫 번째 단계는 저임금 근로자의 몸값만 대책 없이 올려놓은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과감한 폐기다. 그것만이 정책 의도와 반대로 저소득층의 일자리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역설적 상황을 타개할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책이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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