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 통보의 효력을 조건부로 정지한 이후 일본의 태도 변화에 이목이 쏠린다. 사실 그에 대한 관심은 양국이 지소미아 협정과 관련된 각자의 결정을 동시에 발표했던 지난 22일 당시에 최고조를 이뤘다.

하지만 청와대가 지소미아 종료 시점의 조건부 연기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절차 진행 중지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 발표에선 이렇다 할 진전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연히 우리 언론과 분석가들 사이에서는 ‘어? 어?’ 하는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측 발표에서 구체적 입장 변화가 전혀 감지되지 않았던 게 그 이유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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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주체를 두고도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우리 측은 차관급인 청와대 안보실 1차장을 통해 결정 내용을 발표했으나 일본에선 경제산업성(경산성) 국장급 인사인 무역관리부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들의 결정 내용을 공개했다.

기자회견장에 나온 이다 요이치 부장의 발표 내용은 단순 명료했다. 기존의 수출규제 품목들에 대한 개별허가를 유지하고, 한국을 백색국가 리스트에서 제외한 상태 또한 그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대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마저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다 부장은 회견에서 “한국과 국장급 대화를 통해 수출관리 문제를 서로 확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약하나마 일본 측이 대화 의지를 드러낸 것이 진전이라면 진전이었다. 과거엔 우리 산업통상자원부 과장급 인사가 경산성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한 채 냉대만 받고 되돌아왔다.

이번에 양측이 발표한 지소미아 관련 내용을 두고 일본 측에선 ‘완전한 승리’라는 반응까지 나왔다. 한국 측에서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이냐?”는 말과 함께 불만과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표면상 드러난 점을 놓고 보면 양국에서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이 징용 피해자 배상 요구를 거둬들이지 않으면 수출 규제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는 단지 수출관리 강화 차원의 문제라는 주장을 이전 그대로 펼치고 있다. 일본은 한국인 징용 피해자를 ‘구조선반도 출신 노동자’, 수출 규제를 ‘수출관리 강화’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강제 징용은 처음부터 없었으며, 수출 규제도 실시한 적이 없다는 억지주장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소미아 종료 시점의 조건부 연기가 전혀 소득 없이 취해진 것은 아닌 듯하다. 우선 우리는 일본 측의 태도 변화가 없으면 언제든 지소미아 종료 카드를 다시 꺼내들 것이란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미국 등에서 사실상 1년 연장이란 표현을 쓴다지만 기간과 관련해 확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일본이 끝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지소미아는 언제든 그 효력을 잃을 수 있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다 요이치 일본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 [도쿄 = 연합뉴스]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이다 요이치 일본 경제산업성 무역관리부장. [도쿄 = 연합뉴스]

이와 관련, 청와대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 7월 1일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야만 지소미아 연장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올해 7월 1일 이전 상황이란 일본이 우리에 대한 수출 규제를 발표하기 이전의 상황을 의미한다.

이 관계자는 지소미아 종료시점 연기와 WTO 제소 진행절차 정지가 조건부로 취해진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 한국은 여전히 지소미아 종료에 대해 일본에 처음 전달한 문서의 효력을 언제든 활성화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이 이 권한을 활성화하면 그 순간 지소미아는 종료된다는 것이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한·일 간에 양해가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더구나 청와대는 일본이 표면적 발표와 달리 수출규제 조치 재검토 의향을 내비쳤다는 사실도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일본이 체면치레를 위해 겉으로는 큰 소리를 치지만 이면에선 모종의 메시지를 우리 측에 전달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지소미아 종료 여부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일본 측이 ‘대화’를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한국 통상 당국과 국장급 대화를 재개할 뜻을 밝힌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측 간 대화에서 가부간의 결론이 나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릴 것 같지 않다.

그 같은 추정의 근거는 다음달 하순 중국 쓰촨성 청두에서 한·중·일 정상회의가 개최된다는 사실이다. 한·중·일 정상회의는 관련 3개국이 순번대로 돌아가며 의장국 역할을 하는 연례행사다. 올해 의장국은 중국이다. 중국에서 이 행사가 열릴 때의 정식명칭은 ‘중·일·한 정상회의’이지만 우리 언론에서는 의장국에 관계없이 행사명을 보통 ‘한·중·일 정상회의’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7차례 열린 이 행사에는 그 동안 중국과 일본 쪽에서는 총리가, 우리 측에서는 대통령이 참석해왔다. 작년 5월 일본에서 열린 행사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중국의 리커창 총리,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참석했다.

이 행사와 관련한 가장 큰 관심사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 간 양자회담의 성사 여부다. 아직 결정된 게 없다지만 양측 정상이 한·중·일 정상회의 행사 도중 양자회담을 가질 가능성은 크게 열려 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실무대화가 빠른 진전을 이룬다면 그 이전에라도 양국 정상이 만날 가능성이 있다.

정해진 일정으로 볼 때 한·일 양측 간 실무회담은 두 나라 정상 간 만남이 이뤄지는 시점을 겨냥해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실무 회담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진척된 이후 두 정상이 만나 큰 틀의 합의를 도출하는 톱다운 방식이 활용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일본의 수출규제로 촉발된 한·일 간 갈등은 다음달 말 쯤 큰 고비를 맞을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은 올해 한·중·일 정상회의를 청두에서 개최한다고 밝힌 가운데 한국·일본과 12월 하순을 염두에 두고 일정을 조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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