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K기업은행장 낙하산 임명 파동이 일단락됐다. 적어도 표면적 갈등은 급속히 해소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이번 임명 파동이 남긴 후유증은 긴 시간을 두고 독소로 작용하며 기업은행의 건강성을 해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기타 금융공기업 수장 취임과 관련해서도 나쁜 선례가 될 것으로 우려된다.

이번 기업은행장 임명 파동은 낙하산 내리꽂기에 의한 관치의 폐해가 어떠한지를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드러난 폐해의 민낯은 보기 민망할 만큼 추한 모습이었다. 신임 윤종원 행장이 낙하산을 타고 기업은행장 자리에 안착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굴종에 가까운 양보였다. 상대는 기업은행 노동조합이었다. 이 같은 양보는 기업은행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발등의 불인 노조의 출근 저지를 무마하고 자신의 행장실 진입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의 행장실 진입 과정은 공정하지 못했고, 결과도 정의롭지 못했다.

윤종원 신임 IBK기업은행장. [사진 = 연합뉴스]
윤종원 신임 IBK기업은행장. [사진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한 윤종원 신임 기업은행장은 지난 3일 서울 을지로 본점으로 첫 출근을 시도했다. 하지만 노조의 출근저지 투쟁에 막혀 본관 건물에 진입할 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노조의 출근저지는 26일 동안 이어졌고, 윤 행장은 인근에 임시집무실을 마련한 뒤 그곳에서 업무 보고를 받는 등 행장직 수행에 돌입했다. 취임식도 하지 못한 채였다.

노조의 출근저지 명분은 ‘낙하산 반대’였다. 청와대가 내리꽂은 금융실무 무경험자를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노조의 입장이었다. 윤 행장이 화려한 이력을 가진 경제 전문가인 것은 맞지만 금융실무 분야 전반은 물론이거니와 중소기업 금융에 관한 한 문외한이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기업은행은 관치의 그늘을 겨우 벗어나 지난 수년 간 나름의 성과를 내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노조의 낙하산 임명 반대는 여러모로 설득력과 명분을 지니고 있었다.

윤 행장은 행정고시 출신으로 공직에 입문한 뒤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과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등을 역임했다. 국제기구 근무 경력도 화려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각각 상임이사와 특명전권대사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6월까지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재임하다가 경제팀 물갈이 때 김수현 정책실장과 함께 청와대를 떠났다. 사실상 청와대의 경제 분야 참모진 경질 인사에 포함돼 직을 내려놓았다가 문재인 대통령의 배려에 의해 기업은행장에 임명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의 기업은행장 임명은 적법하게 이뤄졌다. 현행 중소기업은행법상 기업은행장은 금융위원장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돼있다. 산업은행이나 한국수출입은행 등 다른 금융공기업 수장에 대한 임면권도 대통령에게 주어져 있다.

문제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낙하산 논란이다. 합법성 여부를 떠나 금융공기업에 대한 낙하산 내리꽂기는 우리 사회의 해묵은 논쟁거리다. 기타 모든 공기업도 마찬가지다. 전문성 없는 인사들이 합법이란 명분 하에 전리품 챙기듯 공기업 수장 자리를 꿰어차다 보니 각종 부작용이 불거져나왔다.

대표적 문제점 중 하나가 낙하산 수장과 노조의 야합이다. 낙하산 인사가 노조의 무리한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는 대가로 수장 자리에 안착한 뒤엔 노조 눈치에 정부 눈치까지 살피느라 소신껏 기업 경영을 펼치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윤종원 행장의 경우가 딱 그렇다. 윤 행장은 지난 27일 노조와 모종의 합의를 이뤄낸 뒤 겨우 출근저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합의 내용이었다. ‘6대 노사 공동선언’이란 이름으로 공개된 합의문은 대략적으로 △임원 선임 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 개선 △노조추천 이사제 추진 △희망퇴직 문제 조기 해결 △회사 측의 임금체계 개편 일방적 추진 자제 △인병휴가(질병에 의한 휴가) 확대 적극 협의 △정규직 처우 개선 노력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조는 또 금융위원장과 여당 원내대표의 공식적인 유감 표명, 행장 선임에 관한 제도 개선 추진 의지 표명 등의 약속을 받아냈다. 공동선언문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자리에는 은성수 금융위원장과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도 함께 있었다.

실제로 이인영 원내대표는 28일 오전 열린 민주당 원내대책회의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기업은행 사태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사실상 노조의 완승임을 보여주는 일련의 모습들이었다.

청와대와 정부·여당이 수확한 것이라곤 알량한 기업은행 행장직 무사 취임이었다. 낙하산 한 명을 무사히 내리꽂기 위해 노조를 상대로 정의롭지도 온당하지도 않은 양보를 해준 꼴이다. 합의 내용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부분은 ‘노조추천 이사제를 유관기관과 적극 협의해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노조의 경영참여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를 두고 정부·여당이 당장의 난관 극복을 위해 낙하산 수장 자리와 노조추천 이사제를 맞바꿨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시각을 윤 행장으로 좁히면 노조의 경영참여를 미끼로 행장직을 보장받았다는 비판이 가능해진다.

결국 이번 기업은행장 취임 파동은 낙하산 임명에 의한 관치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하고 치명적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 민주당이 야당 시절 경고했던 그대로다. 민주당은 야당이던 2013년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가 기재부 차관 출신 인사를 기업은행장으로 보내려 하자 낙하산 반대를 외치며 “관치는 독극물이며 발암물질과 같다”고 주장한 바 있다. 당시 정부는 민주당의 반발을 수용했고, 기업은행은 비로소 관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기업은행장 취임은 과거 민주당이 투쟁에 의해 파쇄했던 낙하산 임명이란 적폐를 스스로 되살린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니 적폐 청산조차도 내로남불식이란 비난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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