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 ‘데카메론’을 읽고 의외의 내용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페스트 감염을 피하려 밀폐된 공간에 모인 사람들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돌아가며 한 이야기를 엮은 것이라곤 하지만 그 내용 일부가 너무 야하다 싶었다. 성적(性的) 호기심이 넘쳐나던 그 시절, 또래들과 골방에 모여앉아 킬킬대며 주고받았던 음담패설도 작품 속의 그것보다는 점잖았던 것 같다. 해서, 문학사적 또는 문화사적 가치는 몰라도 그 내용 만큼은 그리 권장할 게 못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서는 가끔 이 작품이 생각나곤 한다. 불쑥 새로운 감동이 일어서가 아니다. 필자 역시 데카메론 속의 남녀 화자(話者)들에 버금가는 은둔(?)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서이다.

텅 빈 시장 골목. [사진 = 연합뉴스]
텅 빈 시장 골목. [사진 = 연합뉴스]

실제로 요즘 들어서는 우한 폐렴(코로나19) 탓에 외출할 일이 부쩍 줄어들었다. 사무실 동료들의 의견에 따라 재택근무를 주로 하는데다 지인들과의 정기 모임들도 줄줄이 취소 또는 순연됐다. 초대받은 결혼식도 멀찍이 미뤄졌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본의 아니게 은둔 비슷한 생활을 이어가게 됐다. 지루함이 느껴지지만 갈수록 감염병의 기세가 드세지는 바람에 이젠 주기적으로 들르던 동네 의원이나 이발소를 방문하는 것조차 은근히 꺼려진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든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지내면 우리 경제는 어찌 되나’라는 의문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한 친목모임 취소 직후 구성원 중 한명이 단톡방에 “침체된 경기를 살리려면 좀 돌아다녀야 하는데…”라는 메시지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한 폐렴이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 경제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운동장 또는 체육관, 영화관, 식당, 목욕탕 등 대중 이용 시설은 사람이 들지 않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에 처했다. 스포츠계에서는 줄줄이 무관중 경기를 진행하고 있고, 프로축구는 개막 연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당국에서는 보안상의 문제로 재택근무가 최대한 억제됐던 금융기관에서도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게다가 우한 폐렴 확진자가 한명이라도 나오면 건물 전체를 며칠씩 폐쇄하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TV와 신문을 통해 보았던 중국 우한시의 텅 빈 거리, 베이징의 인적 끊긴 대형마트 모습 등이 이제 우리 눈앞에서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고 그로 인해 돈이 돌지 않으면 경제는 활력을 잃는다. 돈의 흐름만 문제되는 게 아니다. 현대 사회는 돈 이외에 사람, 정보, 기술, 문화, 그리고 물자의 이동이 봉쇄되면 작동하기 힘든 예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관계망이 사방으로 얽혀 있어 어느 한 요소의 이동만 막혀도 당장 문제가 발생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의 이동이다.

공급선 단절로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가동률을 낮춘 사례는 하나 둘이 아니다. 자동차 회사나 마스크 제조공장들도 그 사례에 포함돼 있다. 필요한 부품이나 소재를 공급하는 중국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거나 조절한 것이 원인이었다.

우한 폐렴 사태가 예상 외로 큰 파장을 일으키면서 2003년 사스나 2015년 메르스 사태보다 더 큰 후유증을 남길 것이라는 전망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유럽 언론들로부터 우한 폐렴 사태를 너무 가볍게 본다는 비판을 받곤 했던 미국 월가도 뒤늦게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뉴욕증시의 요즘 혼란상이 그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서구 분석 기관들은 우한 폐렴 사태가 가져다줄 경제적 충격이 2008년 금융위기의 그것과 맞먹을 것이란 진단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가장 크게 비상이 걸린 쪽은 우리다. 세계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은 더 커져 있다는 점, 우리의 중국 의존도가 유난히 높다는 점 등이 그 배경이다. 위험 신호를 구체적으로 발하고 있는 곳이 자본시장이다. 증시에서는 우한 폐렴 사태 확산에 맞춰 외국인 자금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일상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는 부정적 영향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항공업계에서는 임금 삭감과 무급 휴직이 시작됐고, 여행사들도 덩달아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2월 셋째 주의 전년 동기 대비 방한 관광객은 48%, 그 중에서도 중국인 관광객은 80%나 줄어들었다. 관련 업계에서 비명이 나올만한 수치다.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정부는 우한 폐렴 조기 극복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소비와 투자 등 내수를 되살리는데 초점을 맞춘 것들이었다. 승용차에 대한 개별소비세 한시 인하와 신용·체크카드 사용액에 대한 소득공제 확대 등이 주된 내용이다.

정부는 이와 별도로 6조원 이상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세출 기준으로 6조 이상이니 세입경정까지 포함되면 사실상 우한 폐렴 추경 규모는 10조원을 크게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우한 폐렴 사태가 메르스 사태보다 엄중하다는 인식을 드러낸 바 있는데 과거 메르스 추경은 세입경정을 포함해 11조6000억원으로 편성됐었다.

추경 편성과 규모의 확대는 불가피한 선택이라 여겨진다. 우한 폐렴이 이전의 감염병들과 달리 토착화될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마당이니 야당들도 추경 편성에 적극 협조해야 할 것이다. 액수 못지않게 추경의 효과를 좌우하는 것이 빠른 집행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정부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종합대책도 좋고 추경도 좋지만 경제 활력을 되살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람의 이동’이라는 점이다. 사람이 움직여야 경제의 혈액인 돈이 돌고 나아가 기술과 정보, 문화, 물자 등이 활발히 이동하게 된다. 그럴 때라야 경제가 유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이동 요소들이 예외 없이 경제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의 이동은 개인의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위험을 감수하라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안전한 이동을 보장할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게 있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현 정부는 안전한 외출의 최소 도구인 마스크 하나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우한 폐렴과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이 대통령 앞에서 기본적인 소모품의 부족을 호소하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산업화 초기 단계의 개발도상국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기막힌 모습이 10대 교역국이자 제조강국인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런 초보적인 문제부터 밤을 새워서라도 하나하나 풀어가는 데 온힘을 쏟아야 한다. 그런 다음 시민들을 상대로 의연한 대처와 자신감 회복을 호소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움직이고 경기도 살아난다. 경기 부양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경제주체인 사람들의 활발한 움직임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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