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통합당의 김종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2020년 예산의 재구성안을 제시했다. 더불어민주당과 통합당은 물론 정의당까지 ‘코로나 예산’으로 100조원을 거론하는 가운데 국가재정을 축내지 않으면서도 그 정도의 돈을 마련할 수 있다며 그가 제1야당 선대위장 취임과 동시에 내놓은 방안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달 29일 통합당 총괄선대위장으로서 가진 첫 공식행사에서 이 방안을 공개했다. 경제통이란 세간의 평가에 부응하려 했던 듯 공식행사의 명칭도 ‘비상경제대책 기자회견’으로 붙여졌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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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밝힌 재원 마련 방안은 512조원 규모의 올해 기정예산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전체 예산의 20% 정도인 100조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즉, 예상치 못했던 우한 폐렴(코로나19) 사태로 상황이 바뀐 만큼 이전에 구성된 예산 항목들을 재조정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100조 정도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김 위원장은 ‘코로나 비상대책 예산’ 항목을 새로 구성하기 위한 법적 근거로 헌법 제56조와 제57조를 거론했다. 두 개의 헌법 조문은 추가경정예산 편성권이 정부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특히 57조는 국회가 정부 동의 없이 예산의 항목에 변경을 가하거나 항목별 액수를 변경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 위원장은 또 총선 직후 임시국회를 열어서 새로운 예산안 승인 작업을 마쳐야 하니 그 일정에 맞춰 예산 재구성 작업을 해달라고 기획재정부에 당부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을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기정예산의 전체 규모를 손대지 않은 채 항목만 바꾸는 방식의 경정예산을 실행하자는 것이다. 생소하긴 하지만 경정예산 추진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 방안이다. 현행 헌법이나 국가재정법엔 추가경정예산이란 단어만 명기돼 있지만 이는 추가예산과 경정예산을 뭉뚱그린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경정예산’은 과거 재정법에 별도로 표기돼 있었지만 현행법에서는 추가경정예산이란 이름으로 통칭된다.

김 위원장은 경정예산 제안을 기자회견 이후에도 수차 재론하며 정부를 향해 준비를 갖춰달라고 당부했다. 재정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일차로 예산 항목 구조조정을 통해 100조원의 재원을 만들자는 것이 기본취지라는 점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의 이 같은 제안엔 감염병 사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것이란 기본 전제가 깔려 있다. 앞으로 얼마일지 모를 큰돈이 더 필요할 수 있으니 일단 나라 곳간을 축내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대한 일차 재원을 마련해보자는 것이 그의 제안 취지인 것 같다.

총선을 목전에 둔 시점인데다 그의 현재 직함을 고려하면 이번 제안은 노회한 정치인이 짜낸 통합당의 선거 전략으로 이해될 여지를 안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 일각에서는 그의 경제 관련 발언들을 두고 경제위기 극복 프레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사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의 경정예산 제안은 경청할 가치가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김 위원장의 주장에 동조하는 뜻을 밝혔다. 안 대표는 감염병 사태 발발 이후 못 쓰게 된 예산 항목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항목 변경은 법에도 명시돼 있다”고 거들었다.

경제전문가인 통합당 유승민 의원 역시 김종인 안에 대해 “새로운 재원 부담이 없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그는 부처별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각 부처의 사업과 연관된 예산 항목을 조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란 점을 지적했다.

김종인 안과 별개인 듯 보이지만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예산 지출 구조조정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지출 내용을 조정해 돈을 추가로 풀어야 할 때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통령의 이 제안은 내용 면에서 김종인 안과 궤를 같이한다.

김 위원장이나 안 의원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올해 기정예산에는 손볼 여지가 많아졌다고 보는 게 옳다. 코로나19 팬데믹이란 비상한 상황에 처했으니 평시를 가정하고 편성해 국회 승인을 받은 기정예산에 손을 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의미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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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적 과제는 급변한 비상 상황에서 쓰이지 않을 예산 항목을 찾아내는 일이다. 기재부가 이제부터 하나하나 뜯어보며 각 부처와 협의를 해나가야 하겠지만,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남북관계 예산 항목이다. 지금 같은 판국에 남북협력 사업 등을 위해 예산을 집행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예산도 손볼 여지가 있는 항목이다. 일시적 실직자들을 위해 필요한 것도 있겠지만, 장기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된 사업들은 재고돼야 한다. 이는 우선순위의 재조정을 위해 불가피한 일이다. 특히 지난해 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까지 면제해가며 밀어붙였던 사업들은 대거 후순위로 미루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를 위해 향후 나타날 일부 지역민들의 반발을 적극적으로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할 것이다.

이 방안을 내놓은 이는 누가 뭐래도 우리 역사에서 가시적 업적을 남긴 경제통이다. 김 위원장은 경제학자 출신으로 우리나라의 건강보험 체계를 설계한 인물이기도 하다. 학계를 떠나 있는 동안에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줄곧 경제 전략가로서의 위상을 다져왔다.

4년 전 20대 총선 직전 그는 지금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있으면서 경제민주화를 주장해 눈길을 끌었었다. 그 당시 김종인 대표는 통합당 전신인 새누리당의 강봉균 선거대책위원장과 경제정책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임으로써 선거 캠페인을 정책대결 구도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당시 강 위원장이 한국판 양적완화를 주창하고 나서자 김종인 대표는 경제민주화로 응수하면서 선거운동 열기를 달아오르게 했다.

거듭 강조하지만 김 위원장의 구상은 정부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장은 총선을 무사히 치르는 게 국가적 과제이지만 총선 직후 임시국회에서 경정예산 문제가 다뤄지도록 하려면 정부는 이제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부처별로 어느 사업에서 얼마 정도의 규모로 예산을 줄일 수 있는지 따져보고 협의하는 것이 간단한 작업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대통령이 긴급재정명령권을 발동하는 문제도 고려해 볼만하다. 경정예산에만 기대를 걸고 있다가는 당장 채무를 상환해야 하거나 사업 운영 자금을 마련해야 하는 자영업자 및 소상공인들을 낭패에 빠뜨릴 수 있다.

이미 국난 단계에 진입한 감염병 사태와 맞서는데 있어서 여와 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 특히 정부는 쓸 만한 아이디어나 제안을 야당 쪽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묵살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출처가 어디든 잘만 활용하면 어차피 그 공은 정부의 몫으로 돌아가게 돼 있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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