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사상 처음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장중 한 순간의 일이긴 하지만 배럴당 국제유가는 -40.32달러라는 희대의 기록을 남겼다. 그 시점에 1배럴의 원유를 샀다면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40.32달러를 판매자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기현상은 20일(현지시간) 미국의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벌어졌다. 이날 NYMEX에서는 5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의 거래가격이 배럴당 -37.63달러를 기록한 채 장 마감이 이뤄졌다. 앞서 말한 대로 장중 최저가는 -40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물론 마이너스 가격에 실물 거래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단지 수치상 마이너스 유가가 형성된 가운데 한동안 개장 상태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찌 됐든 마이너스 유가가 처음으로 현실화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근본 원인은 역시 원유 수요 감소다. 그 바탕엔 우한 폐렴(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세계적 경기침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특히 세계의 공장이란 소리를 듣는 중국에서 산업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면서 원유 수요가 급감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여기에 더해 유가 하락에 결정타를 날린 요인이 따로 있었다. 선물(先物)거래에서 나타나는 ‘콘탱고’ 현상이 그것이었다. 콘탱고 현상은 근월물(近月物)에 비해 원월물(遠月物) 가격이 높게 형성되는 현상을 말한다. 즉, 4월 시점에서 볼 때 5월물보다는 6월물, 6월물보다는 7월물이 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게 보통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5월물이니 6월물이니 하는 것은 선물거래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다. 5월 인도분, 6월 인도분이라는 말과 같다. 선물거래인 만큼 일정 금액을 먼저 주고 미리 정한 가격에 거래를 하되 실물 인도는 해당 월에 이뤄지게 된다.

이번에 기현상을 보인 선물거래 대상은 WTI 5월물이었다. 그런데 이날 거래에서는 콘탱고 현상이 극단적으로 심화됐다. 대개 몇십 센트 또는 몇 달러 정도로 나타나는 콘탱고 현상이 60달러 수준까지 벌어지는 양상으로 전개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원유 수요가 워낙 적다 보니 재고량이 늘고, 그 바람에 원유 저장시설 용량이 부족해지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 그 이유였다. 육상이든 해상의 유조선이든 현재 미국에서의 원유 저장 공간은 거의 소멸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미국의 원유 재고량은 지난주에만 2000만 배럴 정도 증가했다.

저장시설 부족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적 원유 수요량이 일 기준으로 2000만 배럴 이상 줄어들었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포함한 산유국들 모임인 OPEC플러스가 최근 결정한 감산 규모는 하루 970만 배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산 기간도 오는 5~6월로 한정돼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 정유시설. [사진 = 연합뉴스]
미국 캘리포니아주 소재 정유시설. [사진 = AFP/연합뉴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누구도 원유를 실물로 받아 가져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구입자들은 5월물 원유를 받아가는 대신 6월물 원유 선물매입에 나서게 됐고, 그로 인해 5월물 가격이 폭락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21일이 WTI 5월물 만기일이라는 점도 전날의 원유가 하락을 부채질한 요인 중 하나다. 선물거래 계약에서 매입자는 만기일이 지나면 실물을 인도하고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

결국 이번 일은 5월물 만기일 하루 전 원유 매입에 나선 이들이 5월물 대신 6월물 등 원월물을 선택함으로써 나타난 일시적 현상인 것으로 분석된다. 21일 이후에도 국제유가가 지속적으로 마이너스 상태를 이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이 같은 추정은 WTI 6월물, 7월물 가격이 각각 배럴당 20달러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국제적으로 유가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도 20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를 토대로 이번의 마이너스 유가는 일시적으로 나타난 해프닝일 뿐 국제유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은 아니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미국이 5월부터 봉쇄조치를 풀고 경제활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하면 원유에 대한 수요 부족 현상이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주 정부들의 반대가 여전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다음달 1일부터 미국의 경제 활동을 재개시키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감염병 사태가 심화되고 세계 경기가 침체 국면을 장기간 이어갈 경우 마이너스 유가가 언제든 재연될 수 있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심지어 저장시설 부족 현상 심화로 인해 마이너스 유가 현상이 ‘뉴노멀’로 자리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소비는 줄어들고 공급이 그보다 많은 상태가 지속되면 유가의 무한 추락이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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