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 재난지원금 지급 문제를 놓고 여당과 정부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21대 총선 유세 과정에서 전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이를 실행하려 하자 정부가 반대의 뜻을 고수하고 있어서이다. 제1야당 쪽에서 산발적으로 나오는 반대는 오히려 그 다음 문제가 되어버렸다.

민주당과 정부, 청와대 3자는 지난 19일 모임을 갖고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정세균 총리의 국회 시정연설에 앞서 재난지원금 지급범위 문제를 결론지으려 했으나 정부의 반대로 여당 뜻을 관철시키지 못한 것이다. 정부 당국인 기획재정부는 이 자리에서 소득 하위 70%에 한해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을 전제로 확정된 추가경정예산안을 끝까지 지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 = 연합뉴스]

결국 정 총리는 그 다음 날의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소득 하위 70% 이하 1478만 가구에 재난지원금을 지급할 목적의 7조6000억원 규모 추경 예산안에 대해 설명하며 국회 협조를 당부했다. 정부가 지난 16일 제출한 이 추경안은 지방자치단체 분담금 2조1000억원을 보태 9조7000억원을 마련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안에 따르면 정부는 적자국채의 추가 발행 없이 세출 구조조정과 기금 활용 등을 통해 7조6000억원을 마련하게 된다.

하지만 여당이 총선 유세 과정에서 새롭게 제안한 전 가구 지급안을 실행하려면 추경안보다 3조~4조원 많은 예산안이 다시 짜여져야 한다. 하지만 기재부 수장인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여당과 정부 간 갈등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민주당의 이근형 전 전략기획위원장은 21일 MBC라디오 프로그램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기재부를 공격했다. 기재부가 소득 하위 70% 지급안을 고집하는 것을 거론하면서 “기재부가 정치를 한다”고 주장했다. 3조원 정도의 예산 차이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돈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도 지난 20일 당 최고위원회 회의 발언을 통해 이 문제를 거론했다. 그는 미래통합당 당직자가 전 가구 지급 반대 입장을 밝힌데 대해 언급하면서 “선거 때 약속한 것을 뒤집는 수준이라면 20대 국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총선 유세전 당시 황교안 통합당 대표가 전국민에게 50만원씩 지급하자는 주장을 펼친 것을 상기시키며 한 발언이었다. 현재 통합당 측에서는 총선 이후 황 대표가 물러나자 전국민 지급안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여당의 발목을 잡고 있는 쪽은 정부 당국인 기재부, 그 중에서도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다. 여당의 의도대로 하려면 기재부가 추경안을 수정해 국회에 다시 제출해야 하는데 홍 부총리가 그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홍 부총리가 버티기를 하고 있고, 여당이 그를 어쩌지 못한 채 발만 구르는 상황이 만들어진 배경엔 헌법이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헌법 제57조가 홍 부총리의 입장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해당 헌법 조항은 국회가 정부 동의 없이 예산 항목을 늘리거나 항목별 금액을 늘리는 것을 금하고 있다. 국회는 예산안과 관련해 특정 항목을 배제하거나 감액하는 일만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홍 부총리가 동의하지 않고 버티는 한 아무리 막강한 여당이라 할지라도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홍 부총리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추경안 수정에 반대하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전 가구 재난지원금 지급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홍 부총리가 반대 뜻을 굽히지 않자 여당 측에서는 일단 전 가구에 지원금을 주고 추후 고소득자들에게서는 세금을 통해 지원금 일부를 회수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부총리는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지원금 지급은 가구 기준이지만 세금 징수는 개인 기준으로 이뤄지고 △소득세법 상 보조금은 과세 대상이 아니며 △소득이 없는 고액 자산가에게서는 소득세 환수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홍 부총리는 이번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전에 열린 당·정·청 회의에서 소득 하위 50%에 한해 긴급 재난지원금을 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그러나 여당이 80%안을 들이밀며 수혜 범위 확대를 압박하자 결국 70%안을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홍 부총리는 각의에서 확정된 70% 지급안을 지금까지 고수하려 하고 있다. 정부의 곳간지기로서 향후 닥칠지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며 국채발행 여력도 비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다.

홍 부총리는 지난 20일 화상회의로 열린 기재부 확대간부회의를 통해 자신의 소신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그는 곧 시작될 추경안 국회 심의에 철저히 대비할 것을 지시하면서 70% 지급안 고수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그는 “지원 필요성과 효과성, 형평성, 제약성 등을 종합검토해 결정된 것인 만큼 국회에서 그 기준이 유지되도록 설득해달라”고 당부했다. 여당의 전가구 지급 방안에 반대한다는 뜻을 직원들 앞에서 다시 한 번 강조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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