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기업을 키우고 수성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지 못했고, 무노조 경영을 고수함으로써 시대적 요구에도 부응하지 못한 점에 대한 사과였다. 이 부회장은 그에 대한 반성의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 그룹 경영권을 자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것과 무노조 경영 방침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이 부회장은 이 같은 약속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격에 맞는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밝히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대국민 사과 내용은 파격적이라 할 만했다. 특히 경영권의 4대 세습이 없으리라는 약속은 일반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삼성 내부의 핵심 참모 다수가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최대·최고 그룹이자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자리잡은 삼성의 경영권과 관련된 일인 만큼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 = 연합뉴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 = 연합뉴스]

경영권을 더 이상 세습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권고와도 무관한 것이었다. 준법감시위는 앞서 삼성에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탈법 의혹이 불거진데 대해 사과하고 무노조 경영 포기를 선언하라고 주문했다. 이중 경영권 관련 주문은 사실상 이 부회장으로 경영권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의혹에 국한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회장이 4대 세습은 없을 것이란 취지를 분명히 밝히자 사방에서 놀랍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특히 재계가 느끼는 충격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를 잇는 오너 경영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그 배경에 깔려 있다.

실제로 이번 일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갖추는 것이 선이고 오너 경영은 악이라는 인식을 고착화시키는 단초가 될 개연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아직 통설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 굳이 통설을 말하자면 지역적·문화적 특성에 따라 유·불리가 갈릴 수 있다는 것 정도라 할 수 있다.

오너 경영이 갖는 장점에 주목하는 시선들도 적지 않다. 그룹 전체의 역량을 집중해 특정 사업에 매진하거나 사업 방향을 크게 바꾸어야 할 때,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때 과감한 결단을 할 주체가 있다는 점은 오너 경영이 갖는 장점으로 평가돼왔다. 어떤 경우든 결정의 신속성은 오너 경영이 지니는 커다란 장점이었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한 것도 그런 기제가 유용하게 작용한 결과였다. 지금은 미래전략실까지 해체된 상황임을 감안하면 삼성에 있어서 오너십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오너 경영이 갖는 단점도 적지 않게 지적돼왔다. 전문성보다는 오너십이 강조되는 기업 문화 속에서는 한 사람의 오판이 기업 전체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요즘 들어 자주 회자되는 ‘오너 리스크’는 그 같은 위험성을 대변하는 표현이다.

이 부회장의 4대 세습 중단 선언을 두고는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앞으로 있을 재판에서 실형을 면하기 위해 그 같은 선언을 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아주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이 부회장은 박근혜 대통령 재임시 벌어진 국정농단 사건의 파기 환송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 재판에 대한 관심의 초점은 이 부회장이 실형을 선고받을지 여부다.

대법원까지 갔던 재판이 서울고법으로 파기환송된 과정만 놓고 보면 이 부회장이 남은 재판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아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이 부회장의 뇌물 인정액을 기존 36억원에서 86억원으로 늘렸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이후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담당 재판부는 지난해 말 진행된 일련의 공판 과정에서 기업 내부 준법감시제도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 제도의 효율적 운영이 양형의 조건으로 고려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삼성 준법감시위가 만들어졌고, 이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이 부회장은 최근 대국민 사과에 나서게 됐다.

이런 상황인지라 이 부회장의 선언을 두고 실형 회피용이라는 비판이 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이 부회장은 1심에서 징역 5년의 실형을, 2심에서는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이 사건은 상고심으로 이어졌으나 대법원은 뇌물 인정액을 50억원 더 늘린 뒤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부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선고 여부가 아니다. 우리의 주요 관심사는 삼성이 오너 경영을 포기한 뒤 나타날 정치권과 시민사회단체의 평가 및 움직임이다. 여전히 오너 경영 체제를 유지해가고 있는 다수의 재벌그룹 총수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지켜보고자 하는 것도 이 부분일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정치권이 분위기를 어떻게 이끌어 가느냐다. 자칫 섣부른 결론을 내리고 목적을 정한 뒤 일을 밀어붙였다가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경제 선진국들도 관심 있게 지켜봐온 한국의 재벌 문화는 나름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다만, 시대 상황이 바뀐 만큼 재벌의 효용성이 여전한지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뤄질 필요가 있다. 이 부회장의 이번 선언이 그 주제를 공론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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