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이 붕괴된 지 오래지 않은 시점에 취재차 러시아에 간 적이 있다. 1994년 5월 하순 무렵의 일이었다. 당시 느꼈던 충격들은 지금도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첫 번째 충격을 안겨준 것은 막 도착한 모스크바공항의 화장실 모습이었다. 내부가 낡아 퀴퀴한 냄새가 나는데다 일부 좌변기의 경우 중간 덮개가 떨어져 나간 것도 있었다. 젊은 현지 주부의 묵은 때에 찌든 유모차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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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시장에 가보니 상점 진열대엔 빈 공간이 더 많았다. 과자 코너에 한글 상표가 선명한 ‘새우깡’ 한 봉지가 덩그러니 놓인 것도 인상적이었다. 한국산 여성용 스타킹이 선반 위에 두어 개 올려져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설명 듣기론 한국 관광객들이 현지인에게 선물로 건네준 것들이 시장에 매물로 나오곤 한다고 했다.

생필품 부족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케 해준 일들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한 곳은 푸시킨 박물관이었다. 워낙 유명한 곳인지라 도착해보니 입장 대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도 대기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행에게 자리를 지키게 한 뒤 줄 앞쪽의 매표구로 가보니 얼른 상황이 이해됐다. 매표 직원이 입장객으로부터 루블화를 받은 뒤 일일이 불빛에 비춰보느라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루블화는 정정(政情) 못지않게 불안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고 나면 달러 대비 환율이 치솟아 작은 단위의 루블화는 여러 장을 내야 박물관 입장이 가능했다. 위조지폐에 대한 경계심도 커져 있던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매표 직원의 근무 행태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순간 떠오른 생각이 ‘이래서 소련이 망했구나’였다. 입장객 수와 박물관 수익에 대해 그 직원은 오불관언이었다. 그 직원으로서는 위폐를 안 받아 책임질 일을 회피하면 그만일 뿐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었다. 필자에게 푸시킨 박물관 방문은 소련 붕괴가 경쟁 부재에서 비롯됐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기본적인 요소는 경쟁이다. 단, 그 경쟁은 선의의 경쟁이어야 한다. 많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우리 헌법정신에도 그에 대한 실천 의지가 포함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경쟁의 가치를 경시하는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그것도 집권 세력에 의해서다. 명분은 복지 증대와 서민생활 향상이지만, 방법이 과격하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경쟁적 요소의 배제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땀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것을 넘어 성취 자체를 죄악시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논란이 되고 있는 부동산 관련 정책들이다.

최근 여권이 밀어붙인 임대차 3법이 단적인 예다. 임차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은 좋지만 내용 상 임대인에 대한 배려는 배제돼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임대인을 적대시하지 않고서는 제시될 수 없는 내용들이 잔뜩 들어갔다. 내 집인데 내 마음대로 세입자를 내보낼 수도 없고, 임대료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 심한 경우 집을 팔고 싶어도 팔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시행령이나 조례를 통해 미세한 차이가 생길 수는 있겠지만 지역적 차이도 인정되지 않았다. 제도 적용 대상이 금수저 출신의 젊은 졸부인지, 성실하게 청·장년기를 지나온 은퇴 고령자인지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사유재산의 과도한 침해로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도 물론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군사작전하듯 밀어붙인 결과 관련 법안들은 일사천리로 국회를 통과했다.

부동산 관련 세법 개정도 마찬가지다. 세금을 징벌 수단으로 동원하기 위해 거래세와 보유세, 양도세를 인상하는 것도 모자라 증여취득세율 인상까지 강행했다. 세율 증가 정도도 웬만하면 기존의 두 배 세 배다. 정정이 불안한 국가에서 혁명정부가 새롭게 집권한 경우가 아니고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예사로 벌어지고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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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책의 바탕엔 합법적 방법에 의해 큰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죄인시하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임대인도 사람이다’, ‘집 가진 게 죄냐’라는 부동산 정책 반대 시위자들의 구호도 그런 정부의 시각을 엿본데서 비롯됐다.

이 정부의 부동산 정책엔 주택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배어 있다. 인식의 오류는 집 가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자기 집에 거주해야 한다는 비합리적 편견에서 출발한다. 누구든 여유만 있다면 노부모의 안락한 삶을 돕기 위해 집을 덤으로 보유할 수 있고, 직장인은 전출 등에 따라 한동안 새로 집을 장만해 거주지를 옮겨야 할 수도 있다. ‘주택=집주인이 사는 곳’이란 등식이 늘 성립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1주택자의 경우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집을 세주고 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일이 생길 수 있다. 과거의 농경사회였다면 모를까 세입자와 집주인을 명쾌하게 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 세상이다.

정책 입안자들의 그릇된 인식에 가진 자에 대한 적개심 조장 의지가 더해져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부동산 정책들이다. 부자에 대한 적개심 조장의 바탕엔 정치공학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판단된다. 임차인은 내 편이고 집주인, 특히 고가주택 보유자는 내 편이 아니라는 심보가 부동산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이 같은 분석을 뒷받침하는 것이 다주택 유죄, 1주택 및 무주택 무죄로 요약되는 현 정부의 실질적 인사 원칙이다. 우리는 지금 다주택 여부가 고위 정책 담당자들의 자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다주택자에 대한 일반의 시각을 확인하려는 여론조사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버젓이 사유재산이 인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조사를 하려는 발상부터가 우스꽝스럽다. 자본주의의 성공사례로 평가받는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코미디다. 이러니 부동산 정책 반대 시위 현장에서 ‘사회주의 저항운동’이란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부자를 적대시하고 경쟁을 저해하는 반시장적 정책이 압도하는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소련의 붕괴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합법적 사유재산을 범죄의 산물인양 취급하는 것은 우리 헌법정신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가진 자는 치부 과정에 불법이 없었다면 존중과 경외의 대상이 될지언정 비난받을 대상은 결코 아니다.

정부·여당은 부자에 대한 징벌적 과세, 유주택자에 대한 제도적 압박 등이 합법적 절차에 의해 이뤄졌다고 항변할지 모른다. 가진 자에 대한 모든 강압은 입법절차를 거쳐 제도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법치가 늘 최고선일 수는 없다. 법치의 근간이 되는 법이 반듯하지 못하면 그를 토대로 한 형식적 법치는 파멸로 이어질 수 있다. 소련의 몰락을 몰고온 공산당 정부의 여러 정책도 형식논리상으로는 법치의 산물이었을테니 하는 말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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