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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옥의 나이스한 세상] ‘국민’ 앞세운 통합당, 새 이름값 하려면…
[박해옥의 나이스한 세상] ‘국민’ 앞세운 통합당, 새 이름값 하려면…
  • 박해옥
  • 승인 2020.09.0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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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절 한 저명 대학교수가 대통령에게 말했다. ‘국민’ 대신 ‘시민’이란 말을 쓰면 어떻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모 신문 인터뷰 기사에서 이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통령의 외골수식 사고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저런 말을 했을까 싶었다.

사실 문민화 이후 탄생한 대통령 중 박 대통령만큼 국민이란 단어를 자주 입에 올렸던 이도 없다. 과문 탓일지 모르나 박 대통령에게서 시민이란 말을 들어본 기억은 거의 없다. 물론 행정구역을 기반으로 한 호칭은 예외다. 하긴 다른 대통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것도 아니었다. 위의 교수가 지적한 것은 단어 자체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에 대한 대통령의 구태의연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새 당명을 브리핑하는 김수민 민주통합당 홍보본부장. [사진 = 연합뉴스]
새 당명을 브리핑하는 김수민 미래통합당 홍보본부장. [사진 = 연합뉴스]

국민과 시민은 사회학적으로 큰 차이를 지닌다. 국민이 국가라는 집단을 우선시하는 개념이라면 시민은 개개인의 가치를 그 못지않게 중시하는 의미의 단어다. 시민은 국민보다 더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의식을 지닌 사회구성원이라 할 수 있다.

국민과 시민은 국가관에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전자는 자신이 국가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자신이 국가의 유기체적 일부일 뿐이라 여긴다. 그러니 국가라는 집단을 떠나는 순간 존재 가치도 떨어진다고 믿기 십상이다. 반면 후자인 시민은 국가가 국민의 안위와 기본권을 지켜주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을 지닌 존재다. 그들에게는 국가가 지닌 공권력도 그저 개개인으로부터 위탁받은 것에 불과하다.

사회학자들은 이 같은 의식의 차이를 대변하는 개념으로 사회(국가) 명목론과 사회 실재론이란 이론을 개발했다. 이 이론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자주 활용된다.

시민의식이 강력하게 표출된 대표적 사례가 3년여 전의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시위였다. 당시의 촛불시위는 우리 사회 구성원 중 ‘국민’이라기보다 ‘시민’이라는 의식을 지닌 이들이 그 만큼 많아졌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최근 한 여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남북 보건의료의 교류협력 증진에 관한 법률안’(남북의료교류법안)이 언론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그러자 곧바로 ‘국민이 공공재냐’라는 반박이 제기됐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필요시 민간 인력을 동원하려는 입법 의도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 역시 시민의식의 강력한 표출 사례라 할 수 있다.

국민이라는 말 또는 개념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오히려 시민 개개인이 자율적 삶을 중시하면서 또 하나의 지향점으로 삼도록 권장해야 할 개념이다. 그래야 국가라는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된다.

더구나 일상에서 통용되는 국민이란 단어는 그냥 개별적 국가 구성원을 의미한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국민이란 키워드는 진보 진영의 언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준하씨 등이 창당했던 국민당과 김대중 대통령이 만든 새정치국민회의, 그가 대통령 당선 이후 간판으로 내건 국민의정부 등이 그런 경향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번엔 전통 보수정당의 명맥을 이어온 미래통합당이 국민이란 키워드가 들어간 정당명으로 포장을 바꾸려 하고 있다. 이름하여 ‘국민의힘’이다. 이를 둘러싸고 내부 반발이 심상치 않게 나오는 것 같다. 보수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당의 이름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게 주된 반발 이유다. 이에 통합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설득 작업에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일 당 전국위원회의 최종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여진이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현재 통합당이 보여주는 진통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새 이름이 예상을 뛰어넘은 것이라면 그 진통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진정한 탈각과 환골탈태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 과정 자체가 변화와 혁신을 위한 발버둥이라 할 수 있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는 재탄생할 제1야당의 국민이 그저 국가에 충성하는 존재인 군사정권 시각의 국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 각자 기본권을 지닌 시민으로서의 국민을 받들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개인의 인권과 기본권이 강조되는 시기에 ‘국민의힘’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확실히 ‘국민’은 새로운 당명의 또 다른 유력 키워드로 거론된 ‘자유’보다 소구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보수의 가치를 대변하는 개념이지만 참신성이 떨어지는 만큼 홍보 측면에서 보더라도 바람직한 선택지는 아닌 듯하다.

국민의힘은 중도층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과제에도 부합하는 이름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이념과 무관한 이름이라 손사래를 치지만, 여론의 반응으로 보건대 ‘국민’의 전면 배치는 통합당의 좌클릭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통합당이 여당에 한 발 앞서 기본수당 의제를 선점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는 게 정치권의 시각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통합당이 국민 개개인의 곁으로 한 발 더 다가서려 애쓴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간 미래통합당은 프로파간다나 싸움 능력, 심지어 뻔뻔함에서도 운동권 출신이 주축인 집권 여당에 크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왔다. 그런 탓에 집권세력의 실정과 갖은 비리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자신들의 반사이익으로 돌리는데 실패했다.

여기에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 준 이가 김종인 위원장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당명 채택은 이제 그 방향성을 보다 선명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된다. 기대와 함께 한 가지 당부할 일은 이참에 태극기 부대 및 친박세력과 확실히 결별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그럴 때라야 비로소 국민의힘이 능동적이며 주관적인 개념의 국민을 소중히 여기는 정당이라는 점을 확실히 어필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