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2013년 10~12월 20부작으로 방영된 SBS 드라마 ‘상속자들’ 제목의 앞부분에 자리했던 문구다. 최고 시청률 25.6%로 당시 큰 인기를 끈 이 드라마는 부유층 고교생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청춘드라마다. 그 내용은 재벌 상속자 차남 김탄(이민호 분)이 아버지가 원치 않는 여성 차은상(박신혜 분)과 사랑하면서 겪는 고통과 슬픔을 담았다.

김은숙 작가는 왕관을 쓰려면 그에 따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무튼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는 말은 여기저기서 인용됐다.

뜬금없이 드라마 ‘상속자들’을 거론하는 것은 2020년 12월 대한민국에서 왕관을 쓰기 위해 그 무게를 견뎌야 하는 현실 속의 상속자들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사진 = SBS 드라마 '상속자들' 홈페이지 캡처]
[사진 = SBS 드라마 '상속자들' 홈페이지 캡처]

# CJ그룹 장남 이선호 복귀에 쏠린 뜨거운 관심

“이번 인사 발표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정확한 날짜가) 정해진 건 없다. 현재 그룹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이 부장) 징계가 끝나면….”

이선호 CJ제일제당 부장 업무 복귀 여부를 확인하는 질문에 CJ그룹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징계가 끝나면 하지 않겠느냐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10일 발표된 CJ그룹의 2021년도 정기 임원인사 이전까지 초미의 관심사는 이선호 부장의 복귀 여부였다. 발표가 난 뒤에도 ‘복귀한다, 아니다’ 등 언론사 간 전망이 엇갈렸다.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이선호 부장이 지난해 마약 밀수 혐의로 기소돼 올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 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자숙 차원에서 정직기간(3개월)이 끝난 이후에도 업무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이번 임원인사에서 빠졌으나 그가 조만간 복귀하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이미 이선호 부장에게 그룹 내 무게 중심이 쏠리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가 최대주주(51%)로 있는 가족회사 ‘씨앤아이레저산업’이 최근 사업 확장을 시도하는 과정에는 CJ 계열사들이 동원되고 있다. 굴업도 해상풍력 발전사업 기술 심사에는 CJ대한통운의 협력의향서가 제출됐고, 최근 인수한 투자회사 설립 펀드에는 CJ계열사들이 신규 출자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씨앤아이레저산업에 CJ그룹 차원의 일감 몰아주기가 이뤄질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어쩌면 ‘눈 가리고 아웅’일 수 있다. 비난 여론을 의식해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승계 절차를 차근차근 밟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 김동원 한화생명 전무의 초고속 승진에 딴죽 거는 소액주주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상무(35)는 지난달 16일 전무로 승진했다. 전체 임원 56명 가운데 디지털 및 신사업 담당 임원 22명은 평균 연령 45세로 과감한 세대교체를 이뤘는데, 2015년 한화생명 전사혁신실 부실장으로 재직했던 김동원 전무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후계자로서 입김과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했다.

하지만 한화생명 소액주주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한화생명 당기순이익이 2016년 8451억원, 2017년 6887억, 2018년 4465억, 2019년 587억원 등으로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년 7000원대에 머물던 한화생명 주가도 12월 현재 2000원대로 내려가 있다.

일부 누리꾼들은 김동원 전무의 부정적 전력을 소환하기도 한다. 2011년 2월 신호 대기 중이던 차량을 들이받고 달아난 뺑소니 사고, 2014년 2월 대마초 흡연 혐의로 집행유예 2년과 약물치료 및 강의 수강 명령을 선고받은 일 등등이 그것이다.

사실 김동원 전무는 2007년 3월 아버지 김승연 회장의 청계산 보복 폭행을 촉발한 문제적 차남으로 대중들의 뇌리에 박혀 있다. 김 회장은 이 사건으로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명령 200시간을 선고받았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기업 오너 3,4세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재판받고 있지만, 최대주주로 올라선 한국타이어 조현범 사장 등 여럿이 있다.

“대한민국 기업은 소수지분을 가진 지배주주가 계열사를 통해 우호지분을 확보해 기업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기업 거버넌스를 가지고 있다. 국민연금, 일반 주주 등 다수의 주식을 보유한 비(非)지배주주가 소수의 주식을 보유한 지배주주에 의해 제도적으로 기업 거버넌스에서 배제되고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류영재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이 지난해 12월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창립총회에서 한 말이다. 소수 지배주주 중심의 기업 거버넌스는 기업의 장기성장보다는 기업 지배권 강화에 우선한 결정으로 혁신과 성장을 방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KBS ‘시사기획 창’이 지난달 28일 ‘회장님의 상속법’ 편에서 성인 남녀 1048명을 대상으로 ‘재벌 경영권 승계에 대한 인식조사’를 벌인 결과, 절반 이상은 재벌 3~4세 승계에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범죄를 저지른 총수일가의 경영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은 90%에 달했다. 자격과 자질이 없으면 왕관을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아닐까? 그래도 쓰고자 한다면 더 혹독하고 엄정한 평가의 무게를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닐는지.

산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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