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오는 8월부터 국내 제약업체 한 곳이 해외 승인 코로나19 백신의 위탁생산을 시작한다고 예고했다. 이를 위해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계약이 진행되고 있다고도 했다. 기업 간 계약인지라 더 이상 구체적 내용은 밝힐 수 없다고 선을 그었지만 지난 15일 나온 이 발표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백신의 적기 공급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 데다 방역 피로감이 누적된 상황에서 전해들은 뜻밖의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발표 내용이 몰고 온 파장의 강도는 국내 증시의 반응을 통해 확인됐다. 당장 가능성 있는 몇몇 제약회사들의 주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투자자들이 확실한 정보도 없이 감으로 주식을 사들이는 위험한 상황이 연출된 탓이다. 뜬금없이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된 제약사들은 해명에 진땀을 빼야 했다. 일부 업체는 쏟아지는 주주들의 문의를 감당할 수 없어 홈페이지에 공지사항을 띄우고 정부 발표와 무관함을 알렸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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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런저런 전망이 쏟아져 나왔다. 주식 투자자들이 위탁생산 대상 업체에 관심을 가진 것 못지않게 전문가들은 어떤 백신이 그 대상인지에 관심을 드러냈다. 그들 중 일부는 정부가 모더나 백신 도입을 염두에 두고 그런 발표를 했을 것이라 추론했다.

전문가들이 주로 모더나 백신을 떠올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화이자보다 규모가 작은 모더나는 생산기반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의 위탁생산을 통해 생산량을 늘리려는 시도를 할 것이라 여길 수 있다. 모더나가 화이자와 함께 부작용 논란에서 한 발 비켜서 있다는 점도 모더나 백신 위탁생산설을 뒷받침하는 요인이다. 화이자와 모더나는 지금의 부작용 논란과 무관한 mRNA 백신으로 분류된다. 혈전 생성 문제로 요주의 대상이 된 아스트라제네카와 얀센 등은 벡터 백신에 해당한다.

정치권도 발표 내용과 의미를 가늠하느라 분주해졌다. 일각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며 관심을 보였던 모더나 백신의 도입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모더나는 문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자사 백신을 2분기 종료 전까지 한국에 공급한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백신 부작용이 세계적 이슈로 부각되자 자국(미국) 내 공급에 우선순위를 두느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커졌다. 미국에서는 최근 ‘부스터 샷’(효과 강화를 위해 기존 2회 접종보다 한 번 더 접종하는 것) 이야기가 나오면서 백신 물량의 추가 확보 필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주장과 설이 난무할수록 혼란을 느끼는 쪽은 일반 국민들일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아도 불안감을 느끼던 차에 정부가 백신의 대량 위탁생산설을 흘리자 그 전에 자신의 차례가 오면 어떻게 할지 더욱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더구나 선호도가 높은 모더나 위탁생산설까지 제기되고 있으니 순서를 미루려는 이들은 날로 증가할 수 있다. 이로써 가뜩이나 느린 백신 접종 속도가 한층 약화될 수 있다. 이는 11월로 설정한 집단면역 형성 목표 시점이 더 미뤄질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계약이 완료된 정보만 공개한다’던 정부가 왜 갑자기 입장을 바꿔 이번 발표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정부가 치고 빠지듯 대강만 발표한 뒤 그 배경이나 구체적 진척 상황 등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에는 백신 물량 부족에서 초래된 보건 당국의 다급한 마음이 반영됐을 가능성도 있다. 딴에는 접종 지연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성급한 발표를 했을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당국에서도 이 정도로 대비를 하고 있으니 너무 불안해 할 것 없다는 메시지를 주고자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발표가 보건 당국의 정식 브리핑이 아니라 백브리핑을 통해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 여겨진다. 발표 형식으로 보아 기자들에게 이해의 폭을 넓혀줄 목적이 다분했을 것이란 뜻이다.

하지만 형식이 어떠했든 이번 발표가 갖는 무게가 너무 크다는 점을 감안했어야 했다. 국제 관례상 기업 간 계약이 상호 보안 속에 이뤄진다는 것은 상식 중의 상식이다. 섣불리 내용이 외부로 흘러나갔다가는 계약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그런 만큼 최초 발표 주체도 당연히 계약 당사자들이어야 한다.

이 일로 그러지 않아도 더디게 진행된 백신 접종 일정이 더욱 꼬일 수 있다는 점도 문제다. 너도 나도 우리에게 할당될 지 확실하지도 않은 ‘안전한 백신’을 기다리려 할 수 있어서이다. 국민 개개인은 그 과정에서 희망고문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희망고문 끝에 뜻이 이뤄진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만약 8월에 가서도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하면 그때 국민들이 느낄 좌절과 분노는 또 어떻게 관리해 나갈지 우려스럽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일련의 방역 활동을 정상적으로 진행해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 정부의 위탁생산 발표는 매우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코로나19 백신의 확실한 도입이다. 당장의 곤혹스러움을 벗기 위한 고식적 대응은 사태를 더욱 꼬이게 할 뿐이다. 백신 확보가 여의치 않다면 솔직하게 현황을 알리고 필요시 국민들의 양해와 인내를 구하는 것이 최상책이다. 백신 접종 과정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정부부터 차분해져야 한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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