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 3대 축인 미국과 유럽연합(EU), 중국이 참가하는 디지털 화폐 전쟁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EU가 도입을 위한 준비 작업을 선언했고 미국은 디지털 화폐 연구에 대한 조사를 거쳐 오는 9월 초 보고서를 공개할 예정이다. 중국은 이미 디지털 화폐 도입을 공식 선언해도 될 정도로 막바지 단계에 도달해 이들 국가 중 가장 앞서 나가고 있다.

디지털 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는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화폐의 한 형태다. 종이나 동전으로 존재하는 실물 화폐와 달리 실물 없이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디지털 장부에만 존재한다.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처럼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지만, 실물 화폐처럼 가치가 고정돼 있다. 특히 현금을 이용한 거래 비중이 급속히 줄어듦에 따라 디지털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돼 각국이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CBDC는 국가 간 결제에서도 과정이 간소화되고 처리 과정이 빨라진다는 장점이 있다. 각국이 도입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보다 정부의 화폐 통제권이 위협받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가상화폐가 일상에 자리잡은 상황에서 기존 화폐가치와 연동하는 가상화폐인 ‘스테이블 코인’까지 등장하면서 기존 통화시스템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까닭이다. 실제로 페이스북이 만든 스테이블 코인인 ‘리브라’를 두고 각국 정부는 개발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중국 상하이 시내 백화점 상점에 놓인 디지털화폐 사용 안내문. [사진 = 연합뉴스]
중국 상하이 시내 백화점 상점에 놓인 디지털화폐 사용 안내문. [사진 = 연합뉴스]

미국 경제매체 CNBC방송 등에 따르면 유럽중앙은행(ECB)은 디지털 유로화 도입을 전제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지난 14일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 지 9개월이 지났다”며 “그동안 시민·전문가들과 협업으로 (디지털화폐 도입에 관한) 연구를 한 결과 디지털 유로화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고 공식 선언했다. 디지털 유로화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시민들이 상업은행이 아닌 ECB에 실물 화폐에 해당하는 디지털 화폐를 보관하는 디지털 지갑과 같은 형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고 디지털 유로화가 당장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CB는 디지털 유로화 준비 기간을 3년으로 잡고 있다. 파비오 파네타 ECB 이사는 “2년간 설계와 유통, 법률에 관한 작업을 마무리한 뒤 디지털 유로화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며 예상 소요기간은 3년”이라고 언급해 이르면 2026년에 디지털 유로화가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ECB는 특히 디지털 유로가 현금을 보완하는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현금을 아예 없애고 디지털 거래만 인정할 경우 과점이 진행돼 수수료가 높아질 수 있고 개인정보가 유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도 같은 날 미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연준은 디지털 화폐 연구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거쳐 9월 초 CBDC 연구 보고서를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파월 의장은 미국이 기축통화 보유국이라는 점에서 서두르기보다는 “올바르게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그의 이번 발언으로 미국에서도 CBDC 도입을 위한 논의가 조만간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연준은 당초 ‘디지털 달러’ 도입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었지만,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도입에 속도를 내자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해석된다. 연준은 현재 보스턴 연방은행과 함께 디지털 달러 연구를 진행 중이다. 파월 의장은 “중국 등 다른 나라들이 디지털 화폐를 개발하더라도 달러의 전세계 기축통화 위상이 위협받진 않을 것”이라며 디지털 달러는 가상화폐와의 경쟁에서도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 제공/연합뉴스]

중국의 디지털 위안화 도입 준비는 최종 리허설 단계에 진입했다. 지난해 10월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을 시작으로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 상하이(上海), 베이징(北京),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등의 도시에서 대규모 공개 시험 테스트를 벌였다. 공개 시험 테스트 참여 인원은 83만여명, 이들에게 무상 지급된 디지털 위안화 규모는 1억4000만 위안(약 248억원)에 이른다. 이에 따라 중국은 내년 2월 베이징 겨울올림픽에서 디지털 위안화를 전면 공개하기에 앞서 실무 준비를 거의 마쳤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중국 정부는 현재 베이징 올림픽 개최지를 비롯해 선전, 쑤저우, 허베이(河北)성 슝안(雄安)신구, 청두, 상하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랴오닝(遼寧)성 다롄(大連), 후난(湖南)성 창사(長沙), 하이난(海南)성 등 11개 지역을 디지털 위안화 시범지역으로 지정했다. 이들 시범지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은행을 방문해 전자지갑을 만든 뒤 디지털 위안화를 일상에서 폭넓게 사용할 수 있다. 판이페이(範一飛) 인민은행 부행장은 “인민은행 승인을 거쳐 디지털 위안화를 쓰는 ‘화이트 리스트’에 오른 이용자가 현재 1000만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미 중국에서 서울 전체 인구 만큼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쓰고 있다는 얘기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분석에 따르면,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도입에 의욕을 보이는 데는 알리바바그룹의 알리페이와 텅쉰(騰訊)그룹의 위챗페이가 장악한 모바일결제 통제권을 ‘회수’해옴과 동시에 중국 기업들이 달러화 중심의 금융시스템 의존도를 줄여 미국의 제재를 피해 가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2014년부터 디지털 위안화 도입을 본격 준비해온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이를 나라 안팎에 대대적으로 홍보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중국은 앞서 베이징 올림픽에 참가하는 외국인 선수단이 디지털 위안화를 쓸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외국 선수들이 각자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위안화를 충전해 선수촌 일대의 상업시설에서 쓰는 모습을 통해 세계인들에게 디지털 위안화를 강렬하게 각인시키겠다는 것이 중국 정부의 복안이다.

전문위원

저작권자 © 나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