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강의했던 현대 철학자 해리 프랑크푸르트는 거짓말보다 허튼소리를 더 경계했다. 그는 ‘허튼소리에 대하여’를 통해 허튼소리를 진실의 가장 큰 적으로 단정하고 있다. 거짓말쟁이는 진실이 무엇인지 또렷이 의식하고 행동하지만, 허튼소리하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게 그의 지론이다. 그에 의하면 헛소리꾼은 오직 목적 달성에만 관심을 둔다. 사실 여부나 합리성 따위는 안중에 없다. 그래서 허튼소리가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프랑크푸르트의 주장이 잘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순실 사태가 터진 이후의 뒤늦은 각성이지만, 과거 막연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려지면서이다.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 세종시 수정안에 고집스레 반대했던 일, 대통령 취임 후 개성공단을 단칼에 폐쇄한 일, 정책이랄 것도 없는 수준의 대북 단교 정책으로 통일부 공무원들을 9개월 넘게 반실업자로 만들어 놓은 일, 삼권분립이고 뭐고 없이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어 사임시킨 일, 20대 총선을 코앞에 두고 보란 듯이 대구에 내려가 ‘진박’ 후보들에게 힘을 보태준 일, 피해 당사자는 물론 국민 다수가 반대한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를 강행한 일 등등.... 누차 공개된 영상을 통해 확인된 고 백남기 농민의 사인에 경찰이 끈질기게 의문부호를 달았던 일도 그 근본원인은 박근혜의 고집불통에 있었다. 그 고집엔 진실도, 합리성도, 여론의 목소리도 배제된 채 목적 달성을 위한 의지만 배어 있었다.

이런 일들이 하나 둘 누적돼오는 동안에도 박근혜의 행동은 때론 ‘소신’으로, 때론 고뇌에 찬 결단으로 포장되곤 했다. 적어도 최순실 사태가 불거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누구도 ‘불통’을 질타했을지언정 박근혜의 행동을 뒷받침하는 허튼소리의 비논리와 배경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지만, 박근혜의 단세포적이고 직선적인 행동과 그 행동을 옹호하는 허튼소리는 늘 ‘소신’ 또는 ‘신의’가 전제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테면 필자 역시 박근혜가 개성공단 폐쇄를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결정했을 때 반대 목소리를 내면서도 용단 하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은근한 찬탄이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해하기 힘든 가운데 남다른 배포와 ‘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스멀거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대통령의 통치행위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던 개성공단 폐쇄가 통일부의 이름으로 발표될 때 잠시 가졌던 의문은 쉽사리 잊혀지고 말았다. 당시 발표문 문구가 엘리트 관료들의 언어와는 거리가 멀다는 의문을 갖게 해준 대표적 표현이 ‘개성공단 전면중단’이었다. 제목과 본문에 수차례 등장한, 명백한 비문(非文)인 이 표현은 언론들을 통해 여과됨으로써 ‘개성공단 가동 전면중단’ 또는 ‘개성공단 폐쇄’란 문구로 일반에 전달됐다.

최순실 사태가 터진 이후 뒤늦게 무릎을 치며 다시 떠올린 일들은 이외에도 많이 있다. 한 때 박근혜의 영(影)무사 이미지를 심어주었을 만큼 그의 이익을 적극 대변했던 전여옥 전 의원의 독설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전여옥이 훗날 박근혜를 혹평하면서 “신문기사를 깊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던 말이 이제야 실감나게 들리고, “대전은요?”라는 강렬한 단발성 멘트가 논리적 표현력 부족의 결과였음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됐다.

확실히 박근혜는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기본적인 판단력에 문제가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가 최순실의 혼에 접신(接神)됐든 아니었든지간에 박근혜가 그동안 보여온 언행들은 혼이 정상인 사람들로서는 차마 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았다. 이제 국민들은 그가 말하는 ‘비정상’을 ‘정상’으로 바꿔 들어야 하고, ‘정상’을 ‘비정상’으로 알아서 의역해 받아들여야 하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낮은 지능 탓인지 접신 탓인지를 두고 의논이 분분하지만, 중요한 것은 박근혜의 허튼소리 및 행동이 국가 운명에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다는 사실이다. 당장 변칙 스타일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상대하는 일에서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국가 기강을 추스르는 일이 모두 발등의 불이 돼 있다. 이걸 박근혜에게 감당하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국민들이 찬성할 분위기도 아니다. 비상한 시국에 비상한 인물까지는 아니더라도, 혼이 정상 작동하는 인물에게 국정을 맡겨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박근혜는 이미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곧이어 새로운 특검법이 만들어지고 특검의 조사가 시작되면, 박근혜는 2선 후퇴를 하지 않더라도 반년 가까운 세월 동안 반신불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여왕’ 박근혜를 둘러싼 채 근왕(勤王)의 기치를 들었던 이들을 행정부와 정치권에서 속히 일소하기 위해서라도 거국내각 총리의 등장과 박근혜의 무장해제는 빠를수록 좋다. 그런 다음 차근차근 대통령 탄핵 절차를 밟고, 동시에 별도 특검의 조사 활동이 시작되도록 하는게 혼란을 가장 빨리 수습하는 길이다.

이상적이기론 박근혜가 스스로 하야함으로써 사태가 정치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가장 먼저 박근혜의 용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측근들이 앞다퉈 모든 책임을 위쪽으로 돌리고 있는 지금 차라리 “모든게 내 탓이오”를 선언하고 스스로 물러나는게 그나마 치욕을 더는 길이기도 하다. 하야가 선행된다면 최단 기간 안에 거국내각의 총리가 온전한 대행체제를 기반으로 군 통수권을 행사하고 감사원장,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및 헌재 재판관 등에 대한 인사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해결이 난망이라면 국회가 법적 해결에 나서는게 유일한 답이다. 우선은 정치권, 특히 야당들이 상식을 회복해야 한다. 손에 피 안묻히고 익은 감 떨어질 날만 기다리며 대통령을 향해 정치적 해결을 강권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더구나 하야도 아닌, 2선 후퇴 따위의 비합리적인 야당의 허튼소리는 대통령의 허튼소리 못지 않게 국가 운명에 치명적일 수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야당도 조만간 국민들로부터 역풍을 맞을게 뻔하다.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야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게 모두가 윈윈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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