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수년 전 모 대학의 논술전형 제시문에 등장한 신문기사의 일부다.

<통계청은 지난해 청년층의 시간제 근로자 수가 43만9000명으로 2003년 통계 작성 이래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발췌된 이 문장은 실제로 2012년 어느 날 모 신문에 게재된 기사 일부를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옮겨놓은 것이었다. 기사 작성자는 청년층(15~29세)의 저임금화 현상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같은 표현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논란 속에 물러난 황수경 전 통계청장. [사진 = 연합뉴스]
논란 속에 물러난 황수경 전 통계청장. [사진 = 연합뉴스]

하지만 기사 내용이 정확하다면 통계청 측의 설명엔 간단치 않은 문제가 내포돼있다. 논술문제 출제자의 의도 또한 수험생들로 하여금 그같은 문제점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유도하는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요는 ‘통계의 마술’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점을 학생들에게 은연중 상기시켰다는 뜻이다.

위 기사문 중에 나온 통계청의 발표 내용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적어도 팩트에 있어선 그랬다. 하지만 이 설명이 청년 세대의 저임금화 고착화를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뤄졌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청년층 시간제 근로자의 절대수가 늘어난 건 맞지만 전 연령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자료가 그 당시 함께 발표됐기 때문이다.

통계는 각양각색의 연출이 가능한 마술이다. 꼭 그런 건 아닐지라도 그럴 개연성이 상존하는게 통계다. 가끔은 통계 축에도 들지 못하는 산수 수준의 결과치가 조작돼 통계라는 이름으로 발표되기도 한다.

일례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중국을 공격하면서 엉터리 위안화 환율 자료를 들이댔다가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라 할 수도 있다. 진짜 무서운 건 국가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통계의 작성 과정에서 표본을 임의로 조정하거나 특징적 결과치를 도출해낸 뒤 그에 대한 해석을 제멋대로 하는 일이다.

그같은 속성으로 인해 정치 지도자들은 통계기관이 자기 입맛에 맞는 통계자료를 만들어주길 원하기 쉽다. 그런 불편한 현실을 감안한 결과가 서방 선진국들 다수가 실행하고 있다는 통계기관의 독립성 보장이다. 선진국가들의 예가 그러하듯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구두선이 아니라 통계기관을 독립기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혹자는 통계기관의 독립성이 사법부의 그것만큼이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통계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할 때 정부정책이 심각하게 왜곡되고, 국가대계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러한 까닭에 얼마 전 통계청장 인사가 단행된 이후 뒷말이 무성하다. 청와대가 한사코 부인하고 있지만 야당 일각의 주장대로 ‘문재인표 통계자료’ 생산을 위해 통계청장 인사를 단행했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가시지 않고 있다.

정말로 황수경 전 청장이 괘씸죄에 걸려 경질됐는지는 인사권자 외에 누구도 알 수 없다. 따라서 제삼자가 이 문제를 놓고 진위를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소모적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가지는 있다. 이번 인사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냥 때가 돼서 실시된 차관급 인사 중의 하나라고 하기엔 이번 통계청장 인사는 너무나 큰 논란과 후유증의 소지를 안고 있다.

예상되는 논란이 무엇인지는 청와대도 알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만약 논란을 예상하지 못했다면 그건 무능의 소치라고 단언할 수 있다. 논란을 예상하고도 일을 밀어붙였다면 옹졸하다는 비난을 살 만하다.

진위를 떠나 전임 황 청장의 무리수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잘잘못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중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청장 교체 이유와 관련해 표본 및 통계해석의 오류를 지적하지도, 그 사실을 귀책 사유로 공언하지도 않고 있다. 황 전 청장은 차관급 인사 대상자 중 한명일 뿐이었다는 식의 설명만 내놓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해명을 믿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유한국당 등 야당의 입장이 아니더라도 청와대가 이 시점에서 통계청장 교체를 단행한 것을 일상적 차관급 인사로 보긴 어렵다. 더구나 신임 강신욱 청장은 전임자 재직 시절 통계청의 발표 자료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고, 후임 청장이 되고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또 대통령은 그가 제시한 논거를 바탕으로 논란 많은 최저임금 인상의 당위를 강조했다. “최저임금 인상의 긍정적 효과가 90% 이상”이라는 말이 그것이었다.

황 전 청장 역시 이임사를 통해 통계청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강조하면서 통계가 정치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고 주장함으로써 묘한 여운을 남겼다. 이임식 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선 “제가 (윗선의) 말을 잘 듣는 편은 아니었다”는 말까지 했다.

‘권력 친화형’ 상사와 맞짱 뜬 소신을 높이 사 윤석열 검사를 서울중앙지검장으로 발탁한 논리대로라면 황 전 청장은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영전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만약 황 전 청장이 윤석열 부류도 아니고, 단지 업무상 무능한 인물이라고 판단해 경질 인사를 단행했다면 청와대는 이제라도 당당히 말해야 한다. 가계소득동향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진짜로 표본 구성과 자료 해석에서 결정적 오류를 저질렀다면 그 사실을 적시해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옳다.

그리고는 통계상 오류로 국가정책에 대한 신뢰를 심대하게 훼손했으니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고 인사 배경을 말하는 게 국민에 대한 예의이자 소통을 위한 올바른 자세다. 그래도 논란의 여지는 남겠지만, 그나마 소신껏 인사권을 행사했다는 평가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직도 통계청장 교체가 조직의 활력을 위해, 때가 되어 이뤄진 여러 차관급 인사 중 하나일 뿐이라는 오불관언식 해명만 내놓고 있다. 그러니 이젠 하다하다 정권이 통계까지 ‘마사지’하려 든다는 비아냥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앞으로 한국당이 신이야 넋이야 하고 청와대와 정부의 일거수일투족에 ‘국가주의’ 딱지를 마구 붙여대도 박수치는 이들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의 끝간데 없는 아집에 이젠 통계에 대한 신뢰 추락이 오히려 사소한 문제로 인식될 지경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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