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통해 해결하기로 했다. 해당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의 수입 다변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소를 위한 준비 절차에 돌입하겠다는 것이다. 임무를 떠맡은 곳은 산업통상자원부 분쟁대응팀이다.

하지만 WTO 제소의 직접 효과를 두고는 미리부터 회의적 반응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첫번째이자 가장 큰 이유는 WTO를 통한 분쟁 해결 과정이 너무나 길고 험난하다는데 있다. 기간만 해도 얼추 잡아 3년, 경우에 따라 그 이상이 걸릴 수 있다는 게 통상 전문가들의 일반적 견해다.

이번 사태와 비슷한 사례로 2010년대 초에 벌어졌던 중국-일본 간 희토류 분쟁을 들 수 있다. 중국이 2010년 희토류 수출을 제한하자 일본은 중국을 WTO에 제소했고, 3년의 지루한 다툼 끝에 승소했다.

반도체 리지스트. [사진 = 연합뉴스]
반도체 리지스트. [사진 = 연합뉴스]

이번 한·일 간 분쟁이 WTO를 통해 해소되는 데는 그보다 긴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의 경우 지금 당장은 일본을 제소할 뚜렷한 명분을 갖고 있지 못해서이다. 일본이 금수 조치를 취할 것인지 여부가 확실히 가려지려면 일단 세 달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해당 품목의 대한(對韓) 수출이 이뤄질 때마다 일본 당국이 일일이 심사를 하고 허가를 내주기까지 최대 90일이 걸리는 탓이다.

만약 석 달 뒤 일본이 수출을 허가하지 않기로 한다면 비로소 금수 조치가 취해졌다는 근거가 확인되므로 제소의 뚜렷한 명분이 확보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조치 내용만으로도 일본이 WTO협정의 기본인 최혜국 대우 원칙을 위반한 것이므로 제소가 가능하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후쿠나가 유카(福永有夏) 교수는 3일자 니혼게이자이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일본의 이번 조치엔 최혜국대우 원칙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최혜국대우 원칙이란 어느 WTO 회원국이 특정 국가에 대해 교역상 혜택을 줄 경우 다른 회원국들에게도 동일한 혜택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금수 조치가 가시화된다면 한국이 보다 확실한 명분을 앞세워 일본을 제소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문제는 앞서 지적했듯이 지나치게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본의 조치가 단기간 내에 철회되지 않을 경우 당장 큰 타격을 입을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입장에서 보면 WTO 제소는 ‘수입 다변화’만큼이나 한가한 행동으로 비쳐질 수 있다.

WTO 제소 이후 분쟁해결 과정은 크게 1, 2심으로 나뉜다. 과거의 분쟁 사례들을 감안하면 이번 분쟁도 2심까지 간다고 보는 게 현명하다.

거쳐야 할 첫 번째 단계는 당사국 간 협의다. 한국이 일본에 협의를 요청하면 일본은 30일 이내에 그에 응해야 한다. 협의를 위해 주어지는 기간은 60일이다. 이 과정에서 사태가 해결되면 이상적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건은 결국 분쟁조정기구로 넘어간다. 여기서 걸리는 심의 기간이 6개월이다. 이 과정 전반을 통상 1심이라 부른다.

1심에서 결정이 내려진다고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패소한 국가가 2심으로 사건을 끌고 가는 게 일반적이다. 최근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금지를 놓고 벌어진 분쟁에서 한국이 일본에 역전승을 한 무대도 2심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제소로 시작된 당시 수산물 수입금지 사건이 WTO 심의를 통해 결정되기까지 걸린 기간은 만 4년이었다.

WTO의 내부사정을 보면 지금의 환경은 더욱 안 좋다. 현재 분위기상 2심 절차를 진행할 상소기구 구성부터가 만만찮은 과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배경엔 WTO와 미국의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미국이 임기가 끝나는 상소기구 위원의 선출을 보이콧함에 따라 올해 12월이면 위원 1명만 남는 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되면 2심 심의를 위한 상소기구 구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WTO 상소기구는 사건 하나 당 3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기간도 기간이지만 WTO에서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우리 정부는 일본을 제소할 근거 조항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않지만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 11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조항은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경우가 아닌 한 수출에서의 수량 제한 행위를 금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몇 걸림돌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일본의 수출 규제 대상으로 지목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들이 ‘안보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지가 논쟁거리로 부상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이후 자국법인 무역확장법 232조를 들먹이며 중국 등 외국을 상대로 각종 관세 장벽을 쌓고 있다. 중국 기업 화웨이 제재 외에 철강·알루미늄 제품 등에 대한 고율관세 부과 등이 그에 해당한다.

무역확장법 232조는 1995년 세계 교역질서가 WTO 체제에 편입되면서 사문화되다시피 했으나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다시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있다. 그 바람에 ‘안보상의 이유’가 마치 수출 규제의 정당한 수단인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까지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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