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일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어차피 논리 대결이 성립될 수 없는 한판이었다. 일본의 일부 언론을 포함한 주요 외신들이 대체로 예상했던 대로다.

24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속개된 이틀째 이사회에서 한국은 일본의 수출 규제가 안보상의 이유와 무관하게 정치 보복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점을 강조해 회원국들의 묵시적 동의를 이끌었다. 한국이 일본산 수출품에 대한 관리를 소홀히 해 안보상 위험 요인을 제공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은 대화 제의 거부라는 자충수로 인해 별다른 공감을 얻지 못했다.

한국 측 대표는 이날 이사회에서 일본 수출 규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양자 간 고위급 대화를 거듭 제의했다. 이 역시 대항논리를 갖추지 못한 일본을 몰아붙이기 위해 미리 준비된 전략의 일환이었다.

WTO 일반이사회 회의장 모습. [사진 = 연합뉴스]
WTO 일반이사회 회의장 모습.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일본은 한국 대표의 대화 제의에 불응했다. 다만 한국이 일본의 수출품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부적절한 사례가 있었다”는 모호한 입장만 내세웠다. 이와 함께 이번 사안은 WTO 이사회에서 다루는 것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하라 준이치 주 제네바 일본 대표부 대사는 이날 이사회에서 “(수출 규제 조치는) 국가 안보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어서 WTO 회의에서 의제로 삼기엔 적절치 않다”라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 측 대표로 참석한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 일본 외무성의 야마가미 신고 경제국장은 마이크를 잡지 않았고, 대신 이하라 대사가 전면에 나서서 한국 측 주장을 반박했다.

이에 대해 김 실장은 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야마가미 국장은 마이크를 잡을 용기도 없었다”고 공격했다. 이어 “일본의 대화 거부는 일본이 한 행위를 직면할 용기도 확신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김 실장은 회의에 참석한 다른 나라 대사들도 한국 측의 입장에 묵시적으로 공감했음을 자신했다. 그는 회의 석상에서 일본 측에 고위급 대화를 제의한 뒤 다른 나라 대사들에게 이의가 있는지를 물었으나 발언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김 실장은 한국에 대해 강한 지지를 나타낸 것이란 해석을 내놓았다.

[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김 실장에 따르면 회의에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공방을 벌이는 동안 다른 나라 대사들은 발언 없이 양측 주장을 경청했다. 내심 일말의 기대를 보냈던 미국 대사도 일절 발언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우리 측은 “(일본의 조치는)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정치·외교적 보복”이라고 단정한 뒤 WTO와 같은 다자교역체제가 만들어진 이유가 과거에 횡행했던 정치적 무역 보복에 있었음을 강조했다. 또 일본의 행위가 WTO 기반의 다자무역질서를 어지럽히면서 제3국과 선량한 소비자들까지 피해를 입게 만든다는 점을 역설했다.

김 실장은 또 일본이 불과 한 달여 전에 주요 20개국(G20) 의장국으로서 자유무역과 공정무역을 강조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일본 대표를 코너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김 실장은 다자간 교역 질서를 규정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조항이나 WTO 규범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자제했다. 향후 이어질 WTO 제소에서 한국이 제기할 대응논리를 미리부터 노출할 필요가 없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일본 측은 이번 안건이 WTO 의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이 교역 절차 개선 노력을 게을리 했고, 이와 관련된 일본 측의 협상 요구도 최근 3년 동안 묵살해왔다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한국 측의 고위급 대화 제의엔 호응하지 않았다.

한국의 일방적 공세 속에 진행된 안건 논의는 의장인 태국 대사가 양국이 우호적 해결책을 찾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일반이사회가 분쟁해결 기구가 아닌 만큼 가시적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이날의 논의 과정은 일본의 부당성을 입증할 객관적 자료로 남게 됐다. 이들 자료는 향후 한국이 WTO에 일본을 제소한 이후 구성될 분쟁해결기구가 판단을 내리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당초 한국 정부가 일본의 수출 규제 안건을 일반이사회에 상정하도록 요청한 목적도 여기에 있었다. 산업부는 일반이사회를 통해 이번 사안에 대한 일본의 비협조적 자세를 부각시킨 점을 성과로 지목했다. 하지만 더 큰 성과는 일본이 취한 수출 규제에 논리성과 명분이 없다는 점, 일본의 행위가 한·일 간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 등을 164개 회원국 대사들에게 주지시킨 일일 것이다.

이는 향후 한국의 제소로 이 사안이 WTO 분쟁해결기구로 갈 경우 유리한 토대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이 분쟁해결기구에서 승리하면 피해를 본 만큼 일본에 대해 합법적으로 관세 부과 등의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다.

한편 WTO 일반이사회는 2년 주기의 각료회의를 대신하는 기구 내 최고의결기관이다. 분쟁해결기관이 아니어서 구속력은 없지만, 사안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도 있고, 특정 사안의 규범 위반 여부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릴 권한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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