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결국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22일 김유근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은 브리핑을 통해 “한·일 간 군사비밀보호에 관한 협정을 종료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또 협정 종료 결정은 오는 24일까지 외교 경로를 통해 일본 정부에 전달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차장은 지소미아 연장 불가 방침을 정한 이유로 일본이 안보상 이유로 수출규제를 가한 점, 협정 유지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 등을 지적했다.

이번 조치는 우리를 안보상 우방으로 인정하지 않는 일본과 민감한 군사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그로써 우리도 일본을 더 이상 안보상 우방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장관. [사진 = 교도/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고노 다로 일본 외무장관. [사진 = 교도/연합뉴스]

지소미아는 오는 24일까지 양국이 아무런 통보를 하지 않으면 1년 더 자동연장된다. 하지만 어느 일방이 파기(청와대 표현은 '종료') 의사를 통보하면 90일 이후부터 협정은 효력을 잃는다. 따라서 한국은 이날 발표와 별도로 일본 측에 파기 의사를 공식 통보하기로 했다.

이번 결정을 두고 국내외적으로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다. 자유한국당 등 일부 야당에서는 즉각 반발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는 “경제 갈등이 안보 갈등으로 이어진 점을 우려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들은 한국 정부의 결정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주로 나타냈다.

한·일 두 나라 정치권과 언론들은 그간 한국 정부가 지소미아를 일본에 대한 압박카드로 최대한 활용하다가 결국 연장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해왔다. 협정을 연장하되 정보 제공의 양과 질을 조절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됐었다. 비록 한·일 두 나라 간 협정이지만 미국이 현상 유지를 원한다는 점도 협정 유지를 점치게 하는 주요인이었다.

청와대의 이번 결정은 일방적으로 수출 규제를 가해온 일본이 이후에도 특별한 자세 변화를 보이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1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도 일본의 태도 변화가 감지되지 않은 점이 청와대의 협정 파기 결정을 자극한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은 지난 달 4일부터 전격적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용 소재 세 가지에 대해 수출 규제를 가했고, 한국을 수출 우대국에서 제외했다. 수출 규제 시작 이후 한 달 반이 경과한 22일까지 이렇다 할 자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군사 전용 가능성이 없는 포토레지스트에 한해 두 차례 수출 허가를 내주었을 뿐 안보상 우려 대상으로 지목한 고순도 불화수소에 대해서는 여전히 한국행 수출길을 막고 있다. 이 역시 일본 정부의 자세가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 [사진 = 연합뉴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성 장관. [사진 = 연합뉴스]

일본의 태도 변화를 기대케 하는 제스처가 있기는 했다. 최근 들어 일본은 표면상으론 한·일 간 갈등을 대화로 풀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 일본이 수출 규제 이후 한국의 대화 제의를 외면해온 점을 감안하면 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는 행태였다.

이런 제스처는 양국 간 갈등을 촉발한 직접 당사자인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성(경산성) 장관의 22일 발언을 통해 표출됐다. 그는 전제조건을 앞세우며 한국과 국장급 대화를 할 용의가 있음을 공언했다.

문제는 전제조건의 내용이었다. 요지는 한국 정부가 지난 달 12일 일본 경산성 별관에서 있었던 양국 간 과장급 실무접촉의 성격을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다. ‘협의’가 아니라 자신들이 설명을 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음을 분명히 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일본 측과의 ‘협의’를 통해 수출 규제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철회를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경산성은 설명하는 자리였던 만큼 한국 측으로부터 철회 요구를 받은 바 없다는 억지주장을 펼쳤다.

세코 장관이 이번에 제시한 대화의 전제조건은 한국 정부에 더 이상 자존심을 세우지 말고 일본의 주장을 순순히 수용하라는 것이다. 입으로는 ‘대화’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국 정부에 굴복을 요구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오만한 자세는 지난 21일 베이징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담 자리에서도 이어졌다. 이 행사에서는 3자 대화는 물론 한·일 양자 대화도 진행됐다. 당일 만찬에 세 나라 장관이 함께 참석한 것까지 포함하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장관과 하룻동안 세 차례나 대면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 특별한 진전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눈에 띈 것은 한국을 자극하는 고노 장관의 돌발행동이었다. 고노 장관은 회담에 앞서 한국 기자들에게 다가와 들고 있는 카메라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더니 “캐논, 니콘” 등의 글씨를 소리내어 읽었다. 일본산 제품을 수입하지 못하면 한국인들이 큰 불편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점잖치 못한 행동이었다.

베이징 회담에서 강 장관은 고노 장관에게 수출 규제 조치의 즉각 철회를 다시 한번 요구했다. 그러나 고노 장관은 답을 내놓지 않은 채 지소미아 협정에 대해서만 각별한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대화 의지를 드러낸데 대해 일본 측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점도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굳히는데 일조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청와대로서는 일본이 수출 규제를 완화할 조짐도, 대화 의지도 내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 이상 태도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소미아 파기가 몰고올 파장은 만만찮을 것으로 예상된다. 크든 작든 지소미아가 한·일 양국에 가져다준 안보상 이익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 한·미·일 공조체제 자체가 무너지게 됐기 때문이다. 향후 한·일 양국은 군사정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미국과 일대일 접촉을 더욱 강화해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각국에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지 않아도 주한미군 주둔비용을 늘리라 압박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고 보면 정보 제공에 대한 대가를 따로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청와대도 지소미아 파기로 인한 정보 공백을 한·미 동맹 관계를 통해 해소하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하지만 한·미동맹이 예전같지 않은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이익을 유독 강조한다는 점에서 국민적 우려가 쉽게 해소될 것 같지는 않다. 그 같은 우려를 얼마나 실효성 있게 해소할 수 있느냐가 문재인 정부가 새롭게 떠안은 과제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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