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라는 말이 요즘처럼 크게 유행한 적이 또 있을까. 근래 들어 매체에서 거론되는 공포는 모두 경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R의 공포’, ‘D의 공포’, ‘M의 공포’ 등이 그것이다. 이들 공포는 각각 Recession(경기침체), Deflation(디플레이션), Minus(마이너스)의 이니셜에서 비롯됐다.

그러더니 요즘 들어서는 ‘L의 공포’가 자주 거론되고 있다. 여기서 L은 Layoff(해고)란 단어의 이니셜이다. 이는 앞의 세 가지 공포가 일상화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 기업들이 인력 감축에 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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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연합뉴스TV/연합뉴스]

언론에 공포라는 말이 등장하는 빈도는 경제 환경의 악화 정도와 비례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실제로 세계 경제가 날로 악화되어가고 있는 가운데 외부 요인의 영향을 크게 받는 한국경제는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신임 총재도 8일(유럽시간) 세계적 경기 둔화를 경고하면서 한국을 콕 집어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그는 세계 경제가 지난 2년의 상승세를 멈추고 둔화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독일, 네덜란드를 거명한 뒤 이들 나라에선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처방 내용을 떠나 그의 말은 그만큼 한국 경제가 상대적으로 더 큰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가 수출에 주로 의존해야 하는 입장에서 개방경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 그 배경이다. 미·중 무역전쟁과 거기서 촉발된 보호무역주의 경향이 소규모 개방경제 체제를 갖춘 한국에 더 큰 위협요소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진보 정권이 들어선 이래 자율 경쟁보다는 엄격한 룰을 강조하는 통제 위주의 경제정책을 과도하게 적용한 것도 결과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주 52시간제의 무차별적 추진 등이 대표적 사례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친노동적이라 할 이들 정책은 결국 기업의 노동비용을 높임으로써 생산성과 대외 경쟁력을 떨어뜨렸고, 종국엔 경제 활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써 기업들이 고용을 꺼리는 현상이 일기 시작했고, 나아가 기존 직원들까지 해고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친노동 정책이 오히려 노동자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드는 역설적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우리 사회에서는 조선업이 큰 시련을 겪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중공업과 항공산업에 이어 자동차 산업 분야에서 인력 감축 움직임이 일면서 혼란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여파는 조만간 금융업과 정보기술(IT) 산업 등으로 퍼져나갈 것이란 우울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L의 공포’라는 말의 유행은 우리 경제의 이 같은 상황과 직결돼 있다. 공포를 자극하는 움직임은 현재 자동차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르노삼성자동차는 지난 달 희망퇴직 신청을 받은데 이어 지난 7일부터 생산량 감축에 돌입했다. 쌍용자동차는 장기간 이어진 영업손실 탓에 사무직 순환휴직과 복지 축소, 임원 축소 및 임원보수 10% 삭감 등의 자구 조치를 취했다. 군산공장 폐쇄 후 경영 정상화를 꾀했던 한국GM도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로 인해 제2공장 폐쇄와 인력감축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아직은 아니라지만 현대자동차 역시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듯 보인다. 최근엔 고용안정위원회 외부 자문단이 2025년을 시한으로 한 40% 인력감축안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해고 바람은 디스플레이 산업 분야에서도 불고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사업 실적 악화로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선포한 뒤 조직 재편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인력 감축과 재배치가 그 핵심이다. 실행목표의 첫 단계는 임원과 그 휘하 조직의 25% 감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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