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지난 3일 GDP(국내총생산) 물가지수, 즉 GDP 디플레이터를 발표한 이후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 상태에 돌입하는 게 아닌가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커졌다. 일각에선 이미 디플레이션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고 진단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GDP 디플레이터 발표가 우리 사회에 보다 긴박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D의 공포’라는 말과 함께 박근혜 정부 당시부터 심심찮게 거론돼왔다. 그러더니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그 빈도가 크게 높아졌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란 표현도 전보다 자주 언론기사에 등장했다.

[그래픽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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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된 배경은 저물가와 저성장의 고착화 징후다. 물가 상승률과 성장률의 저하는 현 정부에서 한층 심각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 구체적 요소가 2년 연속 2%대 초반 경제성장률의 가시화와 1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0%대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다.

잠재성장률에 크게 못 미치는 저성장 기조는 한국 경제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다. 최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가 한국 경제가 반세기 만에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고 진단한 주된 이유도 고착화 기미를 보이는 저성장 기조였다. 이 매체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년 연속 2.5%를 밑도는 일이 눈앞의 현실이 됐다는 점에 특별히 주목했다.

한국 경제는 2015년부터 차례로 2.8%, 2.9%, 3.2%의 성장률을 보이더니 지난해 상승 흐름을 꺾으며 2.7% 성장률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현 시점에선 올해 성장률 2% 달성도 쉽지 않을 것이란 비관적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내년 성장률 역시 잘 해야 2%대 초반에 그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정부의 기대와 의지가 반영된 전망이 그 정도이니 현실적으론 2%선에서 턱걸이만 해도 다행일 듯 싶다.

물가 또한 심각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올해 들어 내리 0%대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설정한 2% 목표치를 한참 밑도는 수준이다. 미국이나 우리 모두 중앙은행이 물가 상승률 목표치를 2%로 세워두고 있는 것은 그 정도가 건강한 경제 환경을 조성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가는 적당한 선에서 완만한 상승세를 이어갈 때 이상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저물가 및 저성장의 고착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는 마당에 발표된 GDP 디플레이터 자료는 암울한 분위기를 한층 심화시켰다. 그간 저물가와 관련해서 주로 거론돼온 것은 소비자물가와 생산자물가였다. 그 중에서도 한때 마이너스까지 기록할 정도로 낮은 상승세를 이어가는 소비자물가는 디플레이션 우려를 키우는 주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더니 이번엔 올해 3분기의 GDP 물가가 1년 전에 비해 1.6% 하락했다는 한은 발표까지 나왔다. 가계 등 특정경제 주체가 주로 영향을 받는 소비자물가를 넘어 우리 경제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물가지수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얘기다. 이는 곧, 우리나라의 모든 경제주체들이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이 1년 전보다 뒷걸음질쳤음을 의미한다.

달리 표현하면, 가계 소비가 포함된 내수 물가 외에 기업들과 긴밀히 연관되는 수출·입 물가가 함께 낮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히 소비자물가를 포함하는 내수 물가가 1.0% 상승률을 기록한 것을 보면 수출·입 물가가 상대적으로 크게 하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은 발표 내용을 보면, 실제로 수출 물가는 전년 동기에 비해 6.7%나 하락했다. 수입 물가 하락률은 0.1%였다. 그 결과 전체 GDP 물가는 사상 처음으로 4분기 연속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했고, 그 폭 또한 연이어 커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의 GDP 디플레이터 상승률은 차례로 -0.1%, -0.5%, -0.7%를 기록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사진 = 연합뉴스]
홍남기 경제부총리. [사진 = 연합뉴스]

수출 물가 하락의 주된 이유는 반도체 가격의 하락이었다. 최근 글로벌 경기 침체와 중국의 ‘반도체 굴기’ 등의 영향으로 반도체 가격이 국제적으로 하락세를 보인 것이 결정타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수출에서 20%가량을 차지하는 반도체의 가격 하락은 수출 물가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디스플레이와 석유화학제품 등의 수출 물가 하락도 유의미하게 작용했다지만 GDP 물가 하락의 주범은 역시나 반도체 가격 하락이었다.

디플레이션 논란과 관련해 우리가 눈여겨볼 부분은 수출 물가 하락세의 지속성 여부다. 내수 물가와 함께 수출 물가까지 하락 기조를 장기간 이어간다면 우리 경제가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져들 위험성은 매우 커진다고 볼 수 있다. 수출 물가 하락은 글로벌 경기 침체와도 연관이 있는 만큼 세계적 디플레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게 하는 요소다.

보다 전문적이고 세밀한 분석이 선행돼야 하겠지만, 지금 시점에서 수출 물가 하락세가 장기화될지 여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당장 반도체의 경우를 보더라도 국제적 가격이 바닥을 치고 반등할 것이란 전망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다만, 중국의 추격이 치열해졌고 글로벌 경기가 침체 기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은 수출 물가의 상승을 저해하는 요인들이다.

당장 발등의 불이 되고 있는 것은 내수 물가, 그중에서도 소비자물가라 할 수 있다. 현재 정부가 기대하는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대 중후반이다. 0.5~1% 사이에서 결정나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난해 말 1차로 제시했던 1.6%, 올해 7월 수정 제시한 0.9% 등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이 정도면 국제적 평가 기준으로 볼 때 당장 디플레가 현실화될 우려는 크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단, 디플레이션 도래 가능성마저 배제하는 것은 과도한 낙관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올해의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5%선도 넘기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올해 1~8월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누계 평균치는 0.5%였다.

문제는 내년도 물가 상승률을 한은의 목표치에 최대한 근접한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지 여부다. 홍남기 경제부총리가 GDP 물가 발표 이후 내년도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올해보다 높게 책정하겠다고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같은 저물가 기조가 더 이어진다면 우리 경제는 내년에도 ‘D의 공포’에 대한 불안감을 털어내지 못한 채 혼란한 상황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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