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수탁자책임활동 지침)를 실행할 가이드라인이 마련됐다.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가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를 목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할 때 적용될 제반 기준안을 의결을 통해 최종 확정한 것이다.

지난 1년여 동안 논의를 거쳐 마련된 이 가이드라인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과 행사 범위, 이행 절차 등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횡령이나 배임, 경영진의 사익 편취 등으로 기업 가치가 저하돼 주주의 이익이 침해됐음에도 불구하고 개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기업들에 대해 국민연금이 주주로서의 권한을 적극 행사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주주 권한을 행사하는 방법은 이사 해임, 정관 변경을 요구하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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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공단. [사진 = 연합뉴스]

국민연금은 2018년 7월 스튜어드십코드를 처음 도입한 이후 행동에 들어갔지만, 구체적 지침이 마련되지 않음에 따라 자의적 주주권 행사가 이뤄질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기금위는 경영계와 시민사회단체 등의 의견을 취합해 가이드라인 마련 작업을 벌여왔다.

경영 참여를 위한 주주제안(주주총회에 의제 및 의안을 제출함)의 내용은 기금위가 결정하게 된다. 단, 주주제안 내용은 상법과 자본시장법 등에 저촉되지 않아야 한다. 가이드라인에는 주주제안을 철회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도 포함됐다.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에 특별한 사정이 있거나 주주제안이 산업계 전반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있을 경우엔 그 제안을 하지 않거나 철회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단서 조항은 경영계의 의견을 반영해 새로 추가됐다. 기금위는 이에 대해 제도적 안전장치가 마련된 것이라는 자체 평가를 내놓았다. 산업적 특성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수탁자책임 전문위원회에서 논의해 결정하도록 했다.

주주제안의 근거와 관련해 논란이 됐던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 항목에도 손질이 가해졌다. 처음엔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으로 분류돼 있던 기금위의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하락’을 ‘중점관리 사안’으로 재분류한 것이다. 이 역시 경영계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라는 것이 기금위 측의 설명이다.

이번 가이드라인은 경영 참여의 근거가 되는 사안을 ‘중점관리 사안’과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으로 나누고 있다. ‘중점관리 사안’의 경우 4단계를 거쳐, ‘예상하지 못한 우려 사안’에 대해서는 2단계를 거쳐 국민연금의 경영 참여를 결정한다.

국민연금이 ‘중점관리 사안’으로 인해 주주권 행사에 나설 경우엔 △비공개 대화 대상기업 △비공개 중점관리기업 △공개 중점관리기업 △주주 제안 등의 4단계를 거치게 된다. 단계가 길다 함은 해당 기업에 대한 스튜어드십코드 적용을 보다 신중히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기금위 관계자는 강조하고 있다. 주주제안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시간 여유를 갖고 문제 해결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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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ESG 평가 방식 등에 대한 결정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실제로 이를 ‘중점관리 대상’으로 분류해 4단계를 적용하는 데는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관련, 기금위는 2021년 이후 시행을 점치고 있다.

1년으로 설정된 스튜어드십코드 이행 기간은 기금위나 수탁자책임 전문위의 판단에 따라 단축할 수 있도록 했다. 경영 참여 대상 기업이 대화를 거부하는 등 개선 노력을 보이지 않는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이때는 경영 참여에 돌입하기까지의 이행 단계가 축소되거나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기금위와 수탁자책임 전문위는 각각 스튜어드십코드 이행을 위한 활동을 할 때 독립적 기구로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 주주권 행사 대상 기업을 선정하거나 주주제안 내용을 결정할 때 외부의 입김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보장받는다는 의미다.

특히 기금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기업 개선과 주주 이익 극대화를 위해 노력하되 해당 기업이 속한 산업계의 특성과 경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기금위 위원들은 이번에 만들어진 지침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견되면 언제든 소위를 구성해 추가로 개선책을 찾을 수 있다.

이번 가이드라인 결정은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의 구체적 방향과 이행 방법 등을 제시함으로써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을 지닌다. 가이드라인 없이 그때그때 스튜어드십코드가 적용될 경우 조성될 괜한 불안감을 일부 잠재울 수 있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갑작스러운 스튜어드십코드 이행이 주식 시장에 미칠 충격을 완화하는 등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 방침에 대한 논란은 가시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경영계는 가이드라인이 확정되자 즉각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며 유감을 표했다. 정부가 국민연금을 이용해 경영에 간섭하면서 기업을 길들이려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 불만의 요지다.

경영계는 스튜어드십코드 활성화가 노동계와 시민단체 등의 기업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이들 노동 및 시민단체가 국민연금에 압력을 넣어 민간기업의 정관 변경과 이사 선임 또는 해임 등을 좌우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같은 경영계의 우려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게 사실이다. 기금위 구성 상황에 따라 기업 경영에까지 정치논리가 개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영계는 스튜어드십코드의 적극 이행에 앞서 기금위의 독립성 강화가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에 가이드라인이 발표되자 경영계가 당혹감과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영계의 우려대로 기금위가 지금처럼 정부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도를 유지하는 한 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둘러싼 논란은 두고두고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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