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기획한 우한 교민 이송계획이 계획대로 진행돼 700여명이 무사히 국내로 들어왔다. 정부가 잘 해서가 아니었다. 오롯이 수용시설이 위치한 충남 아산과 충북 진천 주민들의 시민의식이 결정적 순간에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극한상황에서 발현된 시민들의 집단지성은 교민들의 도착 당일 감동적인 급반전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수용 반대’ 구호는 환영의 목소리로 바뀌었고, 수용시설 입구에는 ‘힘내라’라는 글씨가 적힌 손팻말이 등장했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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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아산·진천 주민들의 정부에 대한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그들 주민은 병마를 피해 찾아온 교민들을 따뜻하게 맞이했지만, 정부의 불통과 밀어붙이기식 수용 장소 결정에 대해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 당초 충남 천안을 수용 장소로 선택했다가 느닷없이 아산·진천으로 대상지역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의혹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다.

정부는 천안의 시설이 협소해 장소를 아산·진천 두 곳으로 바꿨다고 하지만, 굳이 천안을 복수의 수용 장소 리스트에서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4월 총선을 의식해 여당 의원 지역구에 위치한 천안의 청소년수련원을 제외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천안 내 지역구 세 곳의 국회의원은 모두 더불어민주당 소속이다. 당초 정부가 수용 시설로 지목했던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은 민주당 이규희 의원의 지역구인 천안갑에 위치해 있다. 이웃 천안을(박완주)과 천안병(윤일규)의 현역 의원들 또한 민주당 소속이다. 반면 새로운 수용 시설로 결정된 아산의 경찰인재개발원과 진천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각각 자유한국당 소속인 이명수·경대수 의원의 지역구에 자리하고 있다.

여당의 기동민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펄쩍 뛰듯 의혹을 부인했다.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면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니라고 주장하니 속내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앞서 거론한 정황으로 보면 정부·여당의 저의를 의심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설사 천안 주민들의 집단 반발이 장소 변경의 원인이었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떼를 쓰면 통한다는 나쁜 선례를 또 하나 만들었다는 것 때문이다. 떼를 쓰면 들어주되 상대를 가려가며 들어준다는 것도 이 정부가 갖고 있는 못된 병증의 하나다. 친정부 성향의 시민단체나 이익집단엔 관대하지만, 정치적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의 집단엔 ‘적폐’라는 허울을 씌워 엄단의 칼을 들이대는 일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기에 하는 말이다.

정부의 이중잣대는 우리 사회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암적 요소다. 신뢰 붕괴는 어제 오늘 갑자기 돌출된 것이 아니다. 집권 이후 이어져온 편가르기와 반대 세력과의 불통, 일방통행식 독선적 행정 등이 낳은 불행한 결과물이다.

그 직접적인 원인은 이념 과잉 및 정치 과잉이다. 그 같은 분위기에선 으레 행정은 뒷전이고 정치가 앞서는 상황이 조성되기 마련이다. 여기서 파생된 내로남불식 인식은 정의의 개념조차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다. 이는 우리 편은 정의로우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강박으로 이어졌다. 그들에겐 자신이 곧 선이고 정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선과 정의는 관찰자의 눈에는 독선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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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지만 아산·진천 주민들의 교민 영입 반대 소동은 그 자체로써 우리 사회가 심각한 불신의 늪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회학자들의 이론을 빌리자면 사회적 자본이 고갈돼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은 공동체 사회의 공동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다. 버스나 전철을 탈 때 줄을 서야 한다는 생각, 횡단보도 상의 신호가 파란불일 때는 안심하고 길을 건너도 된다는 믿음, 기타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규범 등등이 곧 사회적 자본의 구성 요소들이다. 내 물건을 누구도 함부로 훔쳐가지 않고, 내 지식과 아이디어를 타인이 부당하게 도용하지 않는다는 믿음 또한 중요한 사회적 자본의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는 선진사회로 평가된다. 그런 사회라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협력과 협업이 원활히 이뤄진다.

반면 사회적 자본이 고갈된 사회에서는 무질서와 비상식이 판치게 된다. 불신이 휩쓰는 사회는 협력이 발붙일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개인과 소규모 이익집단의 배타적 행동만이 판치는 살벌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사회적 자본은 현대 선진사회에서 경제적 자본이나 인적 자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취급된다. 그 자본을 앞장서서 지키고 키우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주체가 정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합의를 통해 합리적이고 공리적인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신뢰가 쌓이도록 유도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그 키워드 중 하나가 앞서 말한 신뢰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돈독한 상태였다면 아산·진천 주민들의 교민 수용 반대 시위는 애시당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은 우한 폐렴 퇴치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존의 누적된 불신에 더해 정부 스스로 새로운 불신의 씨앗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 원인이다. 요즘 우한 폐렴과의 싸움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대응은 시민들의 불신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과연 믿고 따라도 되는 건지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하는 정부의 행동은 하나 둘이 아니다. 더딘 현황 파악과 정보 공개의 미진이 문제로 지적되지만 그건 실력 탓이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미숙함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언젠가 개선될 수도 있는 문제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우한 폐렴이 전세계적으로 팬데믹(대유행) 기미를 보이고 있는 지금도 정부가 정치 이슈에만 매달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통령은 이 와중에 ‘가짜 뉴스’ 타령이나 하고 있고, 총리는 장관들을 모아놓은 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립 준비단을 꾸린다는 내용의 담화문 낭독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들의 관심사보다 정권의 관심사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낸 셈이다.

우한 폐렴 방역과 관련해 중국을 자극할까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행보를 이어가는 것도 볼썽사납다. 중국에서 확진자가 1만명을 넘어섰고 사망자가 수백을 헤아리는데도 정부의 대응은 조심스럽기만 하다. 중국을 바로 이웃에 둔 나라로서 그 어느 나라보다 적극적으로 방역에 나서야 하건만 오히려 원거리의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보다도 소극적이다.

미국의 경우 정부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여행금지 조치를 내렸고, 민간 항공사들은 회사별로 중국 노선 전면 차단에 나서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중국행 항공편에 대해 전면 중단 조치를 내렸다. 일본은 우한이 속한 중국 후베이성에 체류한 적이 있는 여행자들에 대해 전면적인 입국 중단 조치를 취하고 나섰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 우리 정부는 1일 현재 까지도 중국 후베이성에 대해 여행경보 3단계(철수 권고), 중국 전역에 대해서는 2단계(여행 자제) 조치를 발령하고 있을 뿐이다. 중국 유학생들을 대거 수용한 대학들은 개학을 앞두고 전전긍긍하고 있고, 시민들은 깜깜이 정보 공개에 외출마저 삼가고 있는데 정부는 우한 폐렴 사태를 강건너 불보듯 하고 있으니 국민들로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다.

교민 수송 과정에서 드러난 대(對) 중국 외교의 난맥상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만하다. 교민들의 안위를 놓고 양국 간 신경전이 이어지는 동안 주중 한국 대사의 존재가 전혀 드러나지 않은 것도 문제라 할 수 있다.

우한 폐렴 사태는 정부의 위기 대응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라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보여준 정부의 솜씨는 낙제점이다. 원인은 간단하다. 우한 폐렴 잡기보다 가짜뉴스 색출에, 국민적 관심사보다 정권의 관심사에 몰두하면서 중국의 눈치만 살피려는 듯한 인상을 주는 정부의 행태가 그 원인이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질병이 빠른 시일 안에 통제될 것이란 믿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급선무는 정부에 대한 신뢰 회복이다. 신뢰는 정부가 진심으로 국민의 안위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정파를 초월해 질병 퇴치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일 때라야 회복될 수 있다. 이름이야 ‘우한 폐렴’이면 어떻고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면 어떤가. ‘일본 뇌염’이나 ‘중동 호흡기 증후군’,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란 이름이 해당 지역 국가들과 외교 갈등을 유발할 만큼 국제사회는 쩨쩨하지 않다.

국민들의 관심사는 질병의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질환의 원인 바이러스가 얼마나 빨리 국내에서 퇴치될까 하는 것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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