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 급락이 세계 경제에 또 하나의 리스크로 작용하고 있다. 9일(이하 현지시간) 뉴욕증시를 비롯한 세계 증시는 우한 폐렴(코로나19) 사태에 이어 몰려온 저유가 쇼크로 인해 대폭락 장세를 연출했다. 우한 폐렴 사태로 그렇지 않아도 타격을 입은 세계 증시가 연이은 강펀치를 맞고 그로기 직전까지 몰린 것이다.

이날 뉴욕증시에서는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된데 이어 하루 7% 이상의 대폭락 장세가 펼쳐졌다. 우리 증시도 미국보다는 덜했지만 큰 폭의 하락 장세를 나타냈다. 미국의 일부 언론은 금융위기 이후 최대 주가 폭락을 초래한 감염병 사태와 국제유가 급락을 동시에 일컬어 ‘더블 펀치’라 표현했다.

[사진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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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증시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종종 유가가 급등함으로써 벌어졌던 오일 쇼크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다. 과거 오일 쇼크는 유가 상승으로 인해 생산 및 물류 비용을 증가시키고 그로 인해 국제 교역 및 소비를 위축시키는 등 경제활동 전반에 악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유가가 내려가면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이 나타난다는 게 일반적인 논리였다.

하지만 그 같은 논리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유가의 상승 및 하락이 너무 급속히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가 하락이 초래하는 부작용은 요즘 들어 더욱 뚜렷해졌다. 이는 예전과는 다소 달라진 현상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요즘엔 유가가 크게 하락하면 경제활동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거대 석유산업이 큰 타격을 입는다.

특히 부채 비율이 높은 에너지기업들은 유가가 급락한 뒤 저유가 현상이 장기화될 경우 도산이나 채무 불이행, 감원 및 대량 해고 사태 등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나아가 이들 기업에 자금지원을 해준 금융기관들 또한 불안정한 상태에 빠져들기 쉽다.

이뿐이 아니다. 도산 위기에 처한 에너지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가 부실해진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점 중 하나다. 결국 이는 한 나라의 금융안정성 전반을 해치는 결과로 이어진다. 금융안정성 훼손은 해당 국가의 전 산업 분야에 줄줄이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실제로 9일 미국 자본시장에서는 에너지 기업들의 회사채 가격이 약세를 보였고, 뉴욕증시에서는 에너지기업에 대출을 해준 지역은행들의 주가가 크게 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세계 증시의 폭락 장세를 촉발한 국제유가 급락 현상은 사우디와 러시아의 유가정책을 둘러싼 힘겨루기에서 비롯됐다. 뉴욕증시의 주가지수가 대폭락한 9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4월물의 배럴당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24.6%(10.15달러)나 떨어진 31.13 달러를 기록했다. 29년만에 가장 낮은 가격이었다. 이날 5월물 북해산 브렌트유 역시 비슷한 비율의 하락세를 보였다.

유가 급락을 초래한 것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회원국 모임에서의 감산 합의 불발이었다. 이들 산유국은 지난 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회동했지만 러시아가 감산에 반대함으로써 하루 150만 배럴 추가 감산 계획을 승인하지 못했다.

그러자 합의 불발 하루 뒤 주요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원유를 증산키로 한다는 것과 함께 원유 판매가를 배럴당 6~8달러나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감산에 반대한 러시아를 향해 일종의 압박 전략을 구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러시아에 출혈 경쟁으로 맞대응하면서 싸움을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 결국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의미다.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원유저장시설.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오클라호마주의 원유저장시설. [사진 = 로이터/연합뉴스]

분석가들은 두 나라의 기싸움이 주요 산유국들인 사우디와 러시아, 미국의 삼각 대결 구도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사우디가 감산을 통해 원유가를 끌어올리려 하는 반면 러시아는 미국의 셰일원유 산업 붕괴를 노려 원유가격 하락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러시아는 국제유가가 하락할수록 미국산 셰일원유의 가격 경쟁력이 더 크게 떨어진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산 셰일원유는 채굴에 드는 비용이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국제유가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경쟁력을 갖는다. 그 기준선이 되는 배럴당 국제유가는 대체로 60달러 선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이런 이유로 일정 가격 이상으로 중동산이나 러시아산 원유가격이 올라가면 미국은 셰일석유 생산에 적극 나서게 된다. 결과적으로 미국산 셰일원유는 국제유가를 일정한 수준에서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가 사우디 등 OPEC 회원국들에 맞서 원유가격 경쟁을 벌이는 데는 최근 다량으로 발견된 국내 유전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러시아가 공급물량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는 만큼 전통적 생산방식의 원유를 싼값에 다량 공급하려 한다는 분석과 맥이 통한다.

러시아와 사우디의 속셈이 서로 다르고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향후 국제유가의 흐름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저유가 현상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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