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새삼 뜨거운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드러나기로 치면 논란의 핵심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사회활동을 벌여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회계부정 여부다. 이 일로 시민단체 전반에 대한 도덕성 시비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논란의 한 가운데에는 정의연을 이끌어온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자리하고 있다. 세간의 관심은 그가 과연 회계부정을 통해, 그리고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을 서커스단의 곰처럼 이용해 사익을 취했는지에 모아져 있다.

사실 이 일은 내재된 심각성에 비해 그리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진영 논리에 구애받지 않은 채 사법 정의만 제대로 구현되는 사회라면 검찰 수사와 법원 판단을 거쳐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이용수 할머니. [사진 = 연합뉴스]
이용수 할머니. [사진 = 연합뉴스]

이번 논란에 담긴 문제의 본질은 정의연의 활동 방식과 방향을 어떻게 재정립하느냐이다. 여기서 제기하고 싶은 논제가 기억의 주체에 대한 것이다. 정의연의 단체소개와 정관 등을 살펴보면 이 단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을 회복하는 동시에 책임 소재 확인 및 책임자 처벌, 법적 배상 등을 완성함으로써 위안부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로써 미래 세대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올바르게 기억하게 하고, 나아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것을 기본 취지로 삼고 있다.

이는 정의연이 미션으로 위안부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비전으로 ‘평화로운 세상으로’를 제시한 데서 확인된다. 전후 관계상 정의기억연대가 단체명을 통해 앞세운 ‘기억’은 위안부 문제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필수조건이자 실천 과제인 듯 보인다.

그렇다면 정의연이 강조하는 기억의 주체는 과연 누구여야 하는가? 피해자인 우리인가, 가해자인 일본인가, 아니면 양쪽 모두인가.

이에 대한 답을 명료하게 제시해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2차 대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나온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독일 대통령의 저 유명한 연설 ‘5월 8일을 기억하자’가 그것이다. 1985년 5월 8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행해진 이 연설은 나치의 만행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을 포함해 전세계인을 감동시킨 명연설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장문의 연설문 취지를 이 글의 주제에 맞게 추리면 그 골자는 이렇다.

“유대인들은 독일이 저지른 과오를 기억하고 있고, 앞으로도 기억을 이어갈 것이다. 따라서 독일인들은, 비록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일지라도 기억 없이는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유대인들과 화해하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과거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과거의 일들을 망각하려 한다면 그건 비인간적인 행위인 동시에 유대인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화해의 근본을 파괴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 연설에서 주목할 부분은 기억의 주체에 대한 언급이다. 바이츠제커가 강조하고자 했던 과거사 기억의 핵심 주체는 유대인이 아닌 독일인들, 그것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후대의 독일인들이었다. 이 점이 이 연설의 백미다. 만약 그의 연설이 기억의 주체를 유대인들에게 한정했더라면, 즉 과거사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려는 유대인들의 노력을 이해하자는 선에서 멈췄더라면 우리에게 별다른 울림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바이츠제커의 연설문은 불행한 과거사를 가진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곧 한·일 간의 과거사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올바른 기억이라는 점이다. 바이츠제커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은 가해자가 피해자로부터 관용과 용서를 구하려면 먼저 과오를 인정하고 그걸 기억해야 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과는 정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독일이 불행한 과거사를 대대손손 기억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달리 일본은 전범국으로서의 흔적을 애써 지우려 하고 있다. 그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는 한편 거짓역사를 가공생산해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결과 대다수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서 위안부 문제는 서서히 지워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바이츠제커가 강조한 진정한 화해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 연합뉴스]
[사진 = 연합뉴스]

바이츠제커의 연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 해답은 전후 세대 일본인들이 올바른 기억의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돼야만 과거사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과 화해가 이뤄질 길이 열린다.

때마침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가 윤미향 의원이 주도해온 정의연의 활동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정의연이 그간 집회 등을 통해 증오와 상처만 가르쳤다는 일갈을 남겼다. 이 할머니는 또 “이제부터는 올바른 역사교육을 받은 두 나라 젊은이들이 친하게 지내며 대화해야 문제가 풀린다”고 말했다.

일부 인사들이 “할머니의 기억이 왜곡됐다”며 은연중 노망난 노인의 떼쓰기로 몰아가려 했지만 할머니의 역사관은 무섭도록 냉정했다. 그런 역사관을 바탕으로 수요집회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면서 바람직한 운동의 방향까지 제시한 점은 놀랍기까지 했다. 어휘 선택이나 표현 등에서 투박함이 드러나긴 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회견에 진정성을 더해주었다.

이 할머니의 외침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정의연의 활동 방식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제대로 지적해 주었다. 할머니의 문제 제기는 정의연 활동이 특정 집단의 불순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는가 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 중요한 기억의 일방으로서 그 주체가 되어야 할 일본의 미래 주역들까지 싸잡아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것 아니었느냐 하는 것이 할머니의 질타성 반문이었던 듯하다.

이제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는 17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연령을 고려할 때 시간은 우리가 아닌 망각을 원하는 이들의 편이다. 이는 일본의 미래 주역들을 기억의 주체로 만들기 위해 정의연이 서둘러 나서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만 정의연 활동을 둘러싸고 제기된 ‘국내 정치용’ 시비도 조금씩 가라앉게 될 것이다.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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