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딜레마에 빠졌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정부가 딜레마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지금 유 본부장으로 하여금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후보직을 내려놓게 할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정황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이 무척 곤혹스럽게 느껴질 것으로 짐작된다.

전후 사정을 배제한 채 현 상황만 놓고 보면 유명희 본부장의 자진 사퇴가 정답이다. WTO는 그간 사무총장을 만장일치 추대 방식으로 선출해왔다. 결선 진출 후보들에 대한 회원국들의 선호도를 조사한 뒤 보다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후보 한 명을 골라 특별 일반이사회에서 승인받도록 하는 것이 관례였다. 굳이 다수결 원칙의 표 대결을 하지 않고 지지도가 낮은 후보가 스스로 사퇴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 = 산업통상자원부 제공/연합뉴스]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 [사진 = 산업통상자원부 제공/연합뉴스]

이번에도 WTO는 전통적 방식대로 선호도 1위 후보를 회원국 대표 회의에서 공개했다. 지지도 차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다만, 큰 차이로 나이지리아 출신의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앞섰다는 점만 확인해주었다.

WTO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서 이 발표는 통상 다른 후보에 대한 자진사퇴 권유로 인식돼왔다. 지지도 조사에 뒤진 후보가 이를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엔 이변이 발생했다. 미국이 돌연 거부권 행사 방침을 시사한 것이다. 지난 28일 열린 회원국 대표 회의에서 미국 대표가 유일하게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도 여기에 가세했다. 성명을 통해 유명희 본부장을 지지한다는 뜻을 공표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행동은 WTO의 만장일치 추대 계획에 혼선을 가져다주었다. WTO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처럼 특정국에 한해 거부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회원국이든 거부의 뜻을 밝히면 만장일치 추대라는 게임의 룰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미국은 여타 회원국과 다른 무게를 지닌 회원국이다.

미국의 정확한 의도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런 가운데 중국 주도의 WTO 운영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나아가 다자간 무역협상체계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거부감이 작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아메리카 퍼스트’에 입각한 일대 일 협상 또는 고립주의 정책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트럼프 행정부로서는 WTO가 세계 교역질서를 주도하는 것을 꺼려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을 따져보면 지금은 우리가 미국의 유명희 후보 지지를 마냥 반길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해서 선뜻 후보 사퇴를 선언하는 것이 쉬운 상황도 아니다.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질 것을 신경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간 이런 상태를 이어가는 것은 우리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나친 머뭇거림은 결과적으로 WTO의 조기 정상화를 바라는 회원국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로 비쳐질 게 뻔하다. 그로 인한 회원국들의 비난의 화살도 고스란히 받아내야 한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로서는 결코 바람직한 일일 수 없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벌써부터 각국의 비난이 미국을 향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로이터를 비롯한 유럽 언론들이 앞장서서 비난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심지어 유명희 본부장을 지지했던 회원국들 중에서도 미국을 비난하는 나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만에 하나 미국과 우리가 끝까지 버텨 만장일치 추대 룰이 깨지고 표 대결로 간다 해도 우리에게 유리할 건 없는 듯 보인다. 분위기로 보아 이길 가능성도 희박하지만 이긴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그렇게 이겨본들 WTO 사무총장으로서 원만하게 회원국들의 이해를 조정해나갈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도 상정해야 한다. 다음달 3일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패하고, WTO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바뀌는 상황이 닥친다면 그건 그야말로 우리에게 최악이다.

냉정히 돌아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국제기구 수장 자리를 노리기엔 국력이 너무 커진 측면이 있다. 미국이나 중국,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이젠 제3세계 국가 출신의 인사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여러 모로 보아 지금은 유명희 본부장의 WTO 사무총장 후보직 사퇴 선언을 신중히 검토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단, 시점과 분위기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미국을 설득하는 일일 것이다. 마냥 시간을 끌다가는 게도 구럭도 모두 놓치는 상황을 자초할 수 있다.

대표 필자 편집인 박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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