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년 전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부가 건설경기 부양정책을 뒷받침할 요량으로 철근가격 상한제를 전격 실시했다. 철근가격 안정으로 건설 붐을 일으킴으로써 경제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이 정부의 계획이었다. 당시 말레이시아 정부는 제9차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철근가격 상한제 시행의 결과는 참담했다. 철근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시장질서는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가격 상승은 철근 제조업체들이 내수용 공급을 외면한 채 물건 빼돌리기와 수출에만 열을 올리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시장질서 붕괴는 거래 당사자들이 정상적인 과정을 피해 암거래를 선호한데 따른 결과였다.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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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바람에 시공 마감에 쫓긴 건설사들은 톤당 450링깃(당시 환율로 약 130달러)의 웃돈을 주어야 철근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철근의 국제가격은 톤당 580달러였다. 반면 정부가 정한 톤당 가격 상한선은 1570링깃(당시 환율로 약 450달러)이었다. 결국 철근 거래가 정부 지정 상한선을 무시한 채 암시장을 통해 국제가격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말레이시아 정부의 철근가격 상한제는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도 못한 채 부작용만 남기고 말았다. 성과라고는 1도 없는 완전한 실패였다.

이상은 2007년 3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콸라룸푸르 무역관이 본부에 보내온 보고서를 통해 밝힌 내용들이다. 콸라룸푸르 무역관은 보고서 말미에 철근가격 상한제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전망과 함께 “시장원리에 근접한 정부의 해결책이 요구된다”는 시사점을 남겼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가 주택 전셋값을 강제로 억누르자 그 가격이 무섭게 치솟고 있는 것이다. 전셋값을 법령으로써 억누르자 갖가지 편법과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 것도 말레이시아의 철근 파동을 빼닮았다.

전세가격 상승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전세 매물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점 역시 말레이시아 철근 상한제가 가져다준 부작용을 연상시킨다. 전세 매물이 자취를 감추자 자기 집 없이 전세 사는 이들은 너나없이 계약만료 시점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간이 많이 남은 사람들조차 향후 계약갱신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남은 기간 동안 여러 변수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전세 난민이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극단적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의 주택 임대차시장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상황이다. 불확실성은 시장이 싫어하는 악재 중의 악재다. 이를 감안,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불확실성 해소를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게 일반적이다. 기대되는 정책의 실행이 늦어질라 치면 미리 긍정적 메시지를 시장에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선 부동산정책 당국이 불확실성을 잠재우기는커녕 오히려 키우는 역할만 하고 있다. 그로 인해 서울의 국민주택 규모 아파트에서 전세살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현금 5억~6억 정도는 쥐고 있어야 조금은 안심할 수 있다.

불확실성 확대는 각종 부작용을 양산한다. 이는 시장원리의 ABC에 해당한다. 불확실성이 커지면 경제 주체들은 우선 몸부터 움츠리게 된다. 생산적 투자보다는 안전자산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부작용의 또 다른 유형은 말레이시아 철근파동 예에서도 나타난 뒷거래의 난무다. 뒷거래는 그 자체로서는 아닐지 몰라도 탈세 등등의 이런저런 불법성을 동반하기 쉽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시장질서를 기본부터 흔들고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그래픽 = 연합뉴스]
[그래픽 = 연합뉴스]

암거래 또는 뒷거래는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할 때 나타나기 십상이다. 그리고 시장의 비정상화를 초래하는 흔한 원인 중 하나는 시장가격 통제다. 정책의지가 아무리 선하다 할지라도 무차별적 가격통제 정책은 시장원리를 해치는 주범으로 지목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선택한 국가들이 가격통제 정책 시행을 최대한 자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신 크게 신경을 쓰는 것이 수요와 공급의 조절이다. 이 역시 경제의 기본원리 중 하나다. 이를 모르거나 무시하는 정부라면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주도해갈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최악은 깜냥이 안 되면서 오기까지 부리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전국민의 삶이 고달파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우리 상황이 꼭 그렇다. 임차인도 임대인도 모두 고달픈데 정책 당국은 ‘마이 웨이’를 고집하고 있다. 여전히 전세가 상한제를 금과옥조인양 떠받들면서 곧 시장이 안정될 것이란 주장만 되풀이한다.

그러는 사이 시장에선 갖가지 편법과 뒷거래가 난무하고 있다. 이를 설명하는 데는 여러 사례가 필요치 않다. 경제 사령탑의 사례 하나면 충분하다. 홍남기 경제부총리의 뒷거래 사례는 현재의 왜곡된 전세시장 상황을 보여주는 상징적 단면이다. 전세가 상한제를 주도한 그는 최근 스스로 앞장서 만든 법령을 무시한 채 웃돈을 주는 방식으로 세입자를 내보냈다.

많은 매체들이 가십성 기사로 다뤘지만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난센스다. 당장 경제부총리를 물러나게 하고도 남을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수장이 시장의 기본질서를 왜곡시키는데 앞장선 꼴이기 때문이다. 그의 행동은 전세가 상한제가 잘못된 대책임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콸라룸푸르 무역관 보고서가 시사했듯이 시장원리에 반하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주택 매매나 임대차 시장이라고 해서 예외일 순 없다. 해법은 수요·공급의 조화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는다고 해서 수요·공급의 균형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단독이나 빌라 등보다는 아파트, 아파트 중에서도 서울 아파트, 그 중에서도 강남 등 요지의 아파트를 선호하는 일반의 정서가 중요하다. 이에 순응하는 것이 부동산 정책의 첫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야 시장원리의 진정한 회복이 이뤄진다. 정책 실험은 3년 반으로 족하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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